
영화 '순정'(감독 이은희·제작 주피터필름)은 제목처럼 담백한 사랑의 이야기다. 그 시작은 라디오DJ 형준(박용우 분). 그는 어느 날 도착한 한 통의 사연에서 잊을 수 없는 이름을 발견한다. 시간을 거슬러 1991년 남도의 한 섬마을. 여름방학을 맞아 동갑내기 다섯 친구들이 다시 모인다. 다리가 불편해 뭍에 잘 나가지도 못하는 소녀 수옥(김소현 분)의 꿈은 라디오DJ. 소년 범실(도경수 분)은 말없이 수옥에게 자신의 등을 내어주고 밤이면 그 창가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게 기쁨이다. 그러나 이들의 행복했던 여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쪽으로 흐른다.
영화는 어느덧 마흔 줄에 접어든 인물이 돌아보는 과거를 통해 10대의 순도 높은 감정을 에두르는 법 없이 그린다. 영화는 당연히 만든 사람을 닮는다. '순정'의 연출자는 강사로 만난 제작자를 혈혈단신 찾아가 인연을 맺고 직접 각색한 시나리오로 첫 장편을 내놓게 된 신예 이은희 감독(37)이다. 두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한 이은희 감독은 전남 고흥에서 진행된 촬영 내내 젊은 배우들을 '끼고' 살다시피 하며 영화를 만들어냈다. 배우들의 흐뭇한 앙상블을 보면 그녀가 알뜰살뜰 꾸린 정겨운 살림이, 세심한 마음 씀씀이가 보이는 듯하다.
-요즘 센 영화들을 많이 봤는데, '순정'은 참 제목 같은 영화더라. 울면서 봤다.
▶제 영화라 이렇게 말하는 게 웃긴데, 여러 번 봐도 안 힘들다. 제가 만든 29분짜리 단편도 있고 21분 단편도 있는데, 유독 얘가 이렇다. 배우들을 보는 맛 때문이 아닌가 한다. 소소한 걸 배우들이 살려주셨고, 그게 잘 포진됐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게 약이고 독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소소한 디테일이 살았다는 게 센 한 방이 없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고, 앞으로는 어떻게 이야기를 다뤄야 하나 고민도 된다.
-'순정'은 장점이 분명한 것 같다. 다만 달을 보고서 '잘자' 하고 인사하는 그 마음을 받아들이는 관객이라야 영화를 내내 잘 볼 것도 같다.
▶제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영화에 나오는 것도 같다. 틱틱거리다가 '훅' 하고 마음을 잡는 '츤데레' 스타일의 멋진 사람이 아닌 것 같다. 그냥 평범하게, 매 순간 사람들에게 마음을 나누고 사는 게 영화의 톤 앤 매너로 나오는 것 같다. 이 영화가 너무 저 같아서 웃긴다. 지인들이 그런 말을 너무 많이 해준다. 이른바 나쁜남자 스타일은 못 되는 것 같다. 사실 그런 남자 좋지 않다. 늘 마음쓰고 세세하게 챙겨주는 좋은 사람이 좋지. (웃음)
-동의한다. 그런데 사건을 보면 결코 잔잔하지 않다. 제목을 생각하면 오히려 세다는 느낌도 든다.
▶저도 세다고 느낀다. '잔잔하다', '착하다'는 말도 동의가 안 되고. 여운이 있는 영화는 맞다.
-어른이 된 친구들의 이야기가 상당한 비중으로 나온다. 오히려 그 점이 영화의 약점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원래 원작에 없던 부분이다. 성인들의 상황 자체가 다시 세팅했던 거였고 뒷부분은 더더욱 그랬다. 과거를 회상하는 태도에서 영화가 끝나지 않고 직접적으로 더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강한 흔들림을 줬으면 좋겠다고. 제가 이야기하는 이 영화의 주어는 항상 형준(박용우)이다. 현재가 어떤 식의 변화를 겪는 게 중요했다. 전형적인 분량 분배는 아니다. 하지만 감정적인 호흡에서 호흡 균형을 결정했다.

-화제가 된 범실(도경수)과 수옥(김소현)의 '우산키스' 이야기를 해 보자. 듣던 대로 설렜는데 그게 로맨틱하질 않고 박력이 넘치더라. 진짜 지켜줄 것 같았다. 좀 섹시하기도 하고.
▶그렇게 보셨다니, 저도 그랬다. 그거 찍는 날 저도 설렜다. 그냥 로맨틱 코미디의 러브신을 보면 그 때만 살짝 좋지 않나. 살 거 다 살아본 나이가 되니 그렇다. (웃음) 음악을 범실이 얼굴에 딱 맞췄다. 베이스만 깔려 있다가 거기서부터 힘을 제대로 줘서 단단함을 심어줬다. 아주 비장하기까지 하다. 여자 관객들이 잘 봤다고 하니 기분이 좋더라. 나중에 여자가 좋아하는 베드신도 찍고 말 거다.(웃음)
'우산키스' 신은 머리 속에 있는 그림이 너무 확실했다. 대표님 촬영감독님이 다 진짜 키스신을 찍어야 한다고, 안 쓰더라도 한 번 찍어두자고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시나리오에는 굉장히 감성적으로 써 놨다. 경수도 실제로 하는 걸로 읽었더라. 머리 속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세상에 없던 신이고 옆에서 우려를 하니까 진짜 제대로 된 걸 보여줘야 된다는 부담이 있었다.
그 전날 잠을 못 잤을 정도다. 배우들을 1시간 뒤로 데리고 가서 이야기를 했다. 사실 소현이는 10대인데 키스신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고, 경수도 마찬가지였다. 디테일하게 디렉션을 주면 배우들이 차라리 편하게 정확하게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눈치를 본다. 세세히 디렉션을 줬다. 하나하나 끊어가며 찍어서 완성했다.
-여주인공 수옥이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몸이 아픈 예쁜 여주인공이라니 어딘지 전형적이지만 따져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내가 말하는 수옥이가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수옥이를 전형적인 첫 사랑으로 안 그려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전형성을 아주 버릴 수도 없었다. 맨날 치마 입고 다니고, 남자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여지를 남기고, 무슨 말 하면 웃어주고 그런 여자가 저는 싫다. 저는 여자가 봐도 좋은 첫사랑을 그리고 싶었다. 수옥이는 사진 찍는 장면 하나 말고는 치마를 하나도 안 입는다. 꽃무늬나 레이스도 하나도 없다. 다리 아파 불편한 애가 치마를 입고 다니는 게 말이 되겠나. 사실 닭 목을 찍어내는 것도 수옥이고, 친구들을 위기에서 구하는 것도 수옥이고, 사실 범실이에게 먼저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것도 수옥이다. 수옥이가 그런 아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음에는 영화 '순정'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여주인공이 죽음을 맞은 뒤에도 상당 부분 이야기가 전개된다. 배분으로 따져도 독특하다. 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는지 혹은 사고로 죽었는지도 모호하게 처리했다.
▶제 생각은 확실했지만 일부러 그렇게 남겨뒀다. 보는 분들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수옥이가 범실이랑 다시는 만나면 안 되겠다고 결심하는 건 '우산키스' 다음이다. 평생 지켜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다음에 '아 나는 이제 너에게 빌붙어 살면 돼' 그런 건 싫다. 마땅히 '나는 짐으로 살지 않아야지' 하는 결심을 해야한다고 배우에게 디렉션을 줬다. 그런 뒤 수옥은 아빠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그것이 수옥이 죽음을 택한 계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결코 아니다.
-남자 관객과 여자 관객이 볼 때 조금씩 차이가 발생하는 지점이라고 본다.
▶그럴 수 있다. 범실이 입장에서는 '내가 지켜준다고 했는데 왜'라는 생각이 들 거다. 그래서 얘는 울지도 못한다. 사실 당시 콘티에는 운다고 돼 있었다. 사실 범실이가 울지 않게 된 건 범실이 때문이 아니라 후에 나올, (박)용우 선배님이 맡은 형준이 때문이다. 범실이가 거기서 울지 않고 꽉 맺혀야 용우 선배가 터지겠구나 했다. 실제로도 그렇게 촬영했고, 용우 선배님도 '안 울 수가 없게 해 놨네' 그러시더라. 도경수라는 친구도 음악을 하는 친구고 감정이 풍부하다. 수옥이가 죽은 뒤 경수가 정신을 못 차리는 장면은 상당히 먼저 찍었는데 '자 첫 키스를 했다고 칩시다', '업고 울면서 내려왔다고 칩시다' 이렇게 시뮬레이션 하는 게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이 벽을 어떻게 부술까' 이 생각을 하라고 디렉션을 주고 촬영했다.
<인터뷰②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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