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수정(37)의 20대는 날카로웠다. 쉽게 베일 것 같고, 쉽게 깨질 것 같았다. 그 날카롭고, 위태로움은, 임수정만의 도드라짐이었다.
어느덧 30대 중반을 넘긴 그녀는 많이 달라졌다. 여유가 느껴진달까? 날카로움이 안으로 갈무리된 듯 하다. 13일 개봉하는 '시간이탈자'(감독 곽재용)는 임수정의 달라진 모습이 담겨있다. 베이고 상처 입어도 뚫고 나가려 했던 임수정은 간 데 없다.
'시간이탈자'는 1983년의 남자와 2015년의 남자가 꿈에서 서로의 일상을 보면서 과거를 바꾸려하는 스릴러영화다. 임수정은 과거와 현재 남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여자로 등장해 1인2역을 맡았다. 스릴러에서 흔히 쓰이는 장치적인 역할로서의 여성이다. 예전이라면 임수정이 이런 역할을 할까란 생각마저 든다. 임수정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시간이탈자'를 왜 했나. 이런 장치적인 여성 역할은 안 좋아하지 않았나.
▶딱히 그런 기준이 있었던 건 아니다. 2014년 여름에 시나리오를 봤는데 너무 재밌었다. 의도하지 않게 개봉 시점이 비슷한 구성인 '시그널' 이후가 됐지만 그 당시에는 아주 신선했다. 장치적인 역할이라 해도 두 남자가 사건을 쫓는데 좋은 동기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안 그래도 제작진이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제안을 했는데 "시나리오가 재밌는데 왜 안해"라고 했다.
촬영과정과 현장 분위기가 손에 꼽을 만큼 좋았다. 곽재용 감독님이 관록이 있으셔서 현장에서 리더십이 굉장했다. 또 워낙 여배우에 애정을 드러내고, 내가 맡은 캐릭터에 애정이 컸던 터라 행복했다.
-1인2역을 하면서 두 캐릭터가 너무 닮아도 안되고 너무 달라도 안됐는데.
▶감독님이 너무 완전히 달라선 안되고, 그렇다고 너무 같아도 안된다고 하셨다. 특히 1983년 여성 역할은 곽재용 감독님이 원하는 여성상이었던 것 같다. 의상과 메이크업, 헤어스타일까지 하나하나 감독님의 컨펌을 받았다. 아무래도 전작들에서 보여주셨던 것처럼 영원한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내 역할에서 찾으셨던 것 같다.
2015년 역할은 좀 더 자연스럽게 하려 했다. 과거가 사내연애를 하면서 결혼을 앞두고 행복이 터져 나오는 느낌이라면 현재는 좀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려 했다.
-촬영이 끝난 뒤 개봉까지 1년이 넘게 걸리면서 비슷한 소재인 '시그널'과 아무래도 비교가 되는데.
▶'시간이탈자' 촬영이 2015년 2월 초에 끝났다. 더 일찍 나왔으면 정말 좋았을 테지만 배우의 영역을 넘어선 일이니깐. '시그널'을 보진 못했고 기사로만 접했다. 개봉 시기가 이렇게 된 것도 이 영화의 운명이니 할 수 없다.
-'시간이탈자' 촬영이 끝나고 1년 여 동안 작품활동을 하지 않았는데.
▶개인적으로는 되게 바빴다. 그 전에도 1년에 한 작품 정도 했으니 그렇게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 동료, 선 후배 여배우들을 보면 TV드라마와 영화를 병행하면서 노출 빈도가 많아졌더라. 난 영화만 너무 하다보니 노출 빈도가 적어서 더 가끔씩 일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싶더라.
더 적극적으로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많이 열려있다. TV드라마도 그렇고, 독립, 저예산 영화도 열려있다.
-20대에는 깨질 것 같고 베일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면 30대 중반이 넘어선 지금은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
▶물론 지금도 깨질 것 같고, 베일 것 같은 느낌이 아직 내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걸 보여줄 작품이 없어서 그렇지. 30대로서 20대와는 또 다른 베일 것 같은 느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걸 보여줄 작품을 찾고 있기도 하고.
가치관이 변한 건 사실이다. 20대에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30대에는 많이 달라졌다. 20대 때는 너무 일밖에 몰랐다. 30대가 되니 내 삶에 중요한 걸 찾아야겠단 생각이 들더라. 나의 커리어를 여전히 포기할 순 없지만 내 개인의 삶, 인간 임수정, 여자 임수정의 삶도 중요하다. 일과 내 삶을 조화롭게 할 수 있는 게 가장 중요하더라.
그래서 40대의 김혜수, 전도연 선배처럼 50대 김희애 선배처럼 계속 여배우로서 삶을 연장시키고 싶다. 그럴 자신은 아직 없지만 그렇게 하고 싶으니 그렇게 가고 있다.
-과거라면 '시간이탈자'처럼 장치적인 여성 역할은 안 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처음부터 두 남자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이란 걸 알고 들어갔으니깐. 상업영화에서 여배우에게 주어진 역할이 그렇다고 거기에 맞게 하고, 또 더 여성으로 주체적인 걸 하고 싶으면 독립영화를 할 수도 있다. 케이트 블란쳇은 '반지의 제왕'과 '캐롤'이 전혀 다르지 않나. 그렇게 하려 영화 만드는 분들과 이야기하면서 아이디어도 내고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시간이탈자'처럼 '여자여자' 같은 역할은 처음인데.
▶그렇다. 레이스 달린 옷에 치마에 곱게 접은 양말까지 다 처음이다. 그렇게 입혀놓으니깐 보호받는 느낌이라 또 좋더라. 늘 여전사처럼 혼자 노력해서 뚫고 나가려는 역할만 했었으니깐.
특히 전작인 '은밀한 유혹'이 그랬다. '은밀한 유혹'은 내게 잊혀지지 않는 아이다. 평들이 아쉽긴 했지만 당시 메르스 때문에 관객들과 만날 기회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 아이의 운명 같다.

-'은밀한 유혹'에서 호흡을 맞춘 유연석이 주연을 맡은 '해어화'와 '시간이탈자'가 같은 날 개봉하는데.
▶그러니깐요. 몇 개월 전에도 같이 밥도 먹고 그랬는데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됐는지. 그쪽은 여자 둘에 남자 하나, 이쪽은 남자 둘에 여자 하나. 이것도 운명 같다.
-'시간이탈자'에서 호흡을 맞춘 조정석과 이진욱은 어땠나.
▶둘 다 너무 좋았다. 유쾌하고 진지하고, 진지하고 유쾌했다. 배려도 좋고, 스태프에 대한 태도도 좋고. 내가 가장 나이가 많고, 그 다음 조정석, 이진욱 순이라 형제처럼 지냈다. 조정석과는 영화 내용 때문인지 행복한 장면을 찍어도 아련하고 슬펐다. 이진욱과는 동지애 같은 느낌이랄까, 친구 같았다. 그러면서도 묘한 남녀 간의 설렘이 있었다.
-20대를 지나 30대 중반이 되면서 점점 새로운 사람들과 일을 같이 하는데. 소속사도 그렇고, 작품을 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자연스럽게 변하게 된 것 같다. 가치관이 바뀌면서 배우로 바라는 목표도 달라지니 파트너도 자연스럽게 바뀌는 것 같다.
-이제 현장에서 가장 선임이 돼 가는데.
▶그러다보니 많이 달라졌다. 영화 현장에서 경력이 많다보니 내가 메워줘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 물러 설 데가 없다. 끌어주기도 하고 뒷받침해줘야 하기도 하고, 응석도 부려야 한다. 여배우는 남자배우들과는 또 다른 몫이 있다. 스태프들에게 때로는 로망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엄마 같은 역할도 해야 한다. 그런 책임을 느낀다.
-SNS를 하면서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하는데. 잘 꾸며진 모습만 보여줬던 과거와는 달라진 부분인데.
▶그렇다기 보다 소통할 수 있는 길이 생긴 것 같다. 배우로서 예쁘게 꾸며진 모습도 보여주지만 그 밖의 일상도 소중하다. 그 조화가 중요하니깐. 예전에도 일부러 내 일상을 안 보여준 건 아니다. 그런데 소통할 수 있는 곳이 생겼으니 자연스럽게 오늘의 나는 어떻다, 이런 걸 보여주게 되는 것 같다. 민낯을 올릴 때도 그냥 내 모습 그대로 올린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말이 가장 듣기 좋더라.
-차기작은.
▶김종관 감독의 독립영화를 찍는다. 독립영화는 처음인데 친분으로 하게 됐다. 옴니버스다. 그 외에 작품들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바람이 있다면 올 가을 따뜻한 날씨에 촬영장에 있고 싶다는 것이다. TV드라마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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