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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자산어보' 쉽고 깊고 정겨운 징검다리

[리뷰] '자산어보' 쉽고 깊고 정겨운 징검다리

발행 :

전형화 기자
사진

검고 하얗다. 그렇다고 둘로 쪼개져 있지 않다. 검음과 하양이 어우러져 농담이 깊다. '자산어보'의 흑백이 그렇다. 이야기도 그렇다.


어진 임금 정조가 떠났다. 정조가 아끼던 정씨 삼형제 운명은 이제 바람 끝에 등불이다. 조상도 몰라보고, 어버이도 몰라보며, 임금도 모른다는 예수쟁이들은 그저 죽는 일만 남았다. 온갖 비웃음 속에 죽어가는 신자들 속에서 정씨 삼형제는 다른 선택을 한다. 큰형 약현은 천주교(서학)신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순교한다. 둘째 약전은 서학은 사학이라고 배교하고, 막내 약용도 서학에서 정학(성리학)으로 돌아왔다고 말한다. 그렇게 살아남은 약전은 땅끝 흑산도로, 약용은 강진으로 유배길에 오른다.


약전은 바다를 본다. 이 조그만 섬에서도 윗놈들은 아랫사람 것을 뺏어 더 윗놈들에게 갖다바친다. 그래야 하기에 그렇다. 약전은 그래서 바다를 본다. 아무것도 없을줄 알았던 바다에 삶이 있다는 걸 본다. 책으로는 알 수 없었던 걸 본다. 보기야 하는데 알 수 없던 것들은 흑산도에 사는 젊은 어부 창대에게 배운다.


창대는 배움이 고프다. 뭍의 양반 아비가 버리고 간 어미와 먹고 살려 물질을 하면서도 책을 놓지 않는다. 성리학이 정학이며, 정학이 바로 서지 않아 세상이 어지러운 것이라며 짐짓 공부한다. 가슴에 품은 뜻을 펼치고 싶지만, 상놈이 글을 배워서 무엇 할 것이냐는 세상에, 그저 읽은 글을 읽고 또 읽으며 산다.


약전은 그런 창대에게 자신의 배움을 전하고, 창대는 그런 약전에게 자신의 앎을 전한다. 둘은 스승과 제자지만, 서로에게 배운다. 모자란 것을 상대에게서 채운다.


하지만 어린 창대의 그릇은 아직 약전의 배움을 담기가 버겁다. 알아도 익히고 펼치기에 어리다. 창대는 강진에 있는 스승의 아우 약용이 쓰는 책들이 부럽다. 세상을 경영하는 선비의 바른 삶. 그것이야말로 마땅히 펼쳐야 할 도리라 믿는다. 물고기에 관한 책만 10여년째 쓰고 있는 스승 약전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약전은 그런 창대에게 말한다. 자신의 책은, 임금도, 위도, 아래도 없는, 그리하여 백성들이 스스로 잘 살 길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창대는 선비의 도리를 저버리는 것 같은 스승을 뒤로 하고, 자신의 공부를 세상에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섬을 떠난다.


'자산어보'는 정약전의 책 자산어보 서문을 영화적인 상상력으로 구현했다. 외로운 섬에서 젊은 어부 창대의 도움을 받아 썼다는 그 글에서 출발해 감독의 공부를 담았다. 이준익은 공부하는 감독이다. 한국 나이로 63세인 이준익 감독은, 쉼없이 공부하는 것 같다. '자산어보'에는 '사도'도 있고, '동주'도 있고, '박열'도 있고, '변산'도 있다. 핏줄은 통하나 거짓인 아비와 아들도 있고, 피는 안 통해도 진짜인 아비와 아들이 있다. 그렇다고 그 둘을 쪼개지도 않는다. '동주'처럼 흑백이지만 농담은 더 부드러워졌다. '박열'의 페미니즘은 그의 방식대로 더 분명해졌고, '변산'의 힙합 배틀은 싯구 대결로 변주된다. 쌓아온 것들이 허투루 쓰이지 않고, 쉽게 쉽게 펼친다.


'자산어보'는 참 쉽다. 이야기의 전개도, 인물도, 전달하려는 바도 쉽다. 쉬운 건 어렵다. 깊이 공부하고 푸욱 익히지 않는 한 쉽게 풀기란 난망하다. 이준익 감독은 공부한 것들을, 쌓아온 것들을, '자산어보'로 쉽게 풀었다. 이 쉬움이 참 정겹다. 논어의 한 자락과 삶의 한 자락이 겹치는 순간들을 쉽게 담아낸다. 죽어있는 글이, 삶과 겹치는 풍경들을, 그리고 충돌하는 광경들을 쉽게 담아낸다. 사서에 적힌 이름 없는 어떤 삶들을, 그렇게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그는 영화에 삶을 담아내는 법을 이제 완득한 것 같다. 인간사 선악은 있되 그게 흑백으로 명확히 나뉘지는 않는다는 걸, 역설적으로 흑백영화로 그려냈다.


'자산어보'는 징검다리 같다. 성리학과 서학과 동학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순간들을 담아내고 싶다던 이준익 감독의 영화 꿈에 징검다리 같다. 백성을 다스리는 선비를 위한 책(정약용의 '목민신서)보다는 백성이 스스로 살아가는 책(정약전의 '자산어보')을 택한 건, 백성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으로 이어질 듯 하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세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자산어보'를 놓쳐선 안되는 이유기도 하다.


정약전을 연기한 설경구는 깊어졌다. 그는 이제 가슴의 불을 다스리는 법을 익힌 것 같다. 곁을 떠난 창대의 소식에 "잘 살면 고맙지"라고 할 때의 설경구 얼굴은, 이 배우의 깊이를 엿보게 한다. 설경구의 팬들이라면 이정은의 대사에 반색할 데도 많다. 창대 역을 맡은 변요한은 좋다. 영화 속에서 점점 더 좋아진다. 배우가 영화 속에서 점점 더 좋아지는 모습을 보는 기쁨을 맛 볼 수 있다.


정약용으로 특별출연한 류승룡의 무겁고 낮음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추다.


'자산어보'는 바닥으로 떨어진 중년의 이야기다. 바닥에서 일어난 청년의 이야기다. 돌고 돌아 섬에 오니, 처음의 어두운 흑산은 따뜻한 자산이 됐다. 이 돌고 돔이 참 좋다.


3월31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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