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게 열심히 살지 말지 그랬어." 남편 만수(이병헌 분)의 비밀을 알게 된 미리(손예진 분)는 그렇게 속삭이며 남편의 비밀을 덮는다. 남편을 위해, 그리고 자신과 아이들의 평온한 삶을 위해.
'어쩔수가 없다'는 허상 같은 행복을 위해, 유치원에 들어갈 때부터 경쟁하며 너무나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에게 건네는 박찬욱 감독의 관찰일지이자 산문 같은 이야기다.
영화 '어쩔수가 없다'는 '다 이루었다'고 느낄 만큼 삶이 만족스러웠던 회사원 '만수'(이병헌 분)가 덜컥 해고된 후, 아내와 두 자식을 지키기 위해, 어렵게 장만한 집을 지켜내기 위해, 재취업을 향한 자신만의 전쟁을 준비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1997년 발표된 미국 소설 '액스'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박찬욱 감독이 그동안 여러 차례 준비해오고 있다고 밝힌 그의 회심작이다.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남성의, 가장의, 삶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고뇌를 그려낸다. 직업이라는 것이 먹고 사는 돈벌이에서 자신을 정의 내리는 수단이 돼 버린 한 가장이 스스로가 생각하는 행복을 지키기 위해 인간성을 포기하고 타인의 삶과 자신을 삶을 파괴해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영화는 가장 행복한 정점에서 시작해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는 가족의 모습을 그린다. 만수는 최근 마련한 교외의 전원주택에서 회사에서 선물 받은 장어를 구워 먹으며 아름다운 아내와 댄스를 추고 아들, 딸 그리고 반려견 두 마리까지 함께 끌어안으며 행복을 즐긴다. 스스로의 삶에 대해 '다 이루었다'라고 평하며 행복을 느끼던 그 순간, 그 행복을 받치고 있던 회사, 그동안 자신이 몸 바쳐 일했던 제지 회사에서 해고당한다.
3개월 안에 재취업하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실직 기간이 1년이 넘어가자 가족의 삶이 변하기 시작한다. 만수가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조금씩 무너져 간다. 자신이 어린 시절 살던 집을 다시 사서 살며 그 집에서 온실을 가꾸고 두 마리의 대형견을 키우는 삶. 전업주부 아내는 테니스를 치러 다니고, 딸은 첼로를 배우며, 부부가 함께 댄스 수업을 듣는 그 삶이 무너진 것이다.
집을 팔고 이사 가자는 아내의 말이, 이제 자신도 파트 타임으로 일하러 나가겠다는 선언이, 아이들에게 넷플릭스까지 끊으라고 하고 (이미 가족인) 반려견 두 마리까지 보내자는 그 통보가 만수의 목에 칼날처럼 들이밀어졌다. 이제 만수의 선택은 어쩔수가 없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행복을 지키기 위해, 재취업에 걸림돌이 되는 경쟁자를 제거하고 '열심히' 그 자리를 차지하기로 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딜레마에 빠진다.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이 그랬듯이 욕망과 신념이, 의지와 윤리가 부딪친다. 한 가정의 가장이지만 제대로 된 어른은 되지 못한, 자신의 가정만이 중요한 만수는 '나의 아내, 나의 자식, 나의 가정'을 위해 자신과 닮은 사람들이 파괴해 간다. 1년 넘게 지속되던 치통의 원인인 어금니를 뽑으며 마지막 경쟁자인 선출(박희순 분)을 제거하는 모습에서 무서울 정도로 맹목적인 신념을 느낄 수 있다. 그가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성실한 인간에게 잘못된 방향성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볼 수 있다.
'어쩔수가 없다'의 만수는 우리 사회 보통의 가장을 대변하고 있는듯 하지만, 관객을 그에게 감정 이입하기 힘들다. 박찬욱 감독은 만수의 상황과 감정에 대해 관객을 설득하지 않고 몰아치는 방법을 택했다. 만수의 선택에 대해 공감한다기보다 오히려 경악하면서 박찬욱 감독의 블랙 코미디가 빛을 발한다. '어쩔수 없지 않는 상황'에서 어쩔수 없다며 달려 나가는 만수를 보며 오히려 묘한 느낌이 든다.
배우들은 적재적소에서 제 역할을 해낸다. 이병헌의 연기는 두말하면 입 아프다. 그가 아니면 누가 이 영화 속 만수를 연기할까. 떠올려봐도 대체자가 없다. 손예진은 기대보다 더 잘했다. 남성성 강한 이 영화 속에서 손예진은 현모양처 아내이자, 만수의 행복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서 움직이면서 그 감정을 따라 살아 숨쉰다. 그저 소비되지 않고 그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 영화에 녹아들었다. 이성민, 염혜란, 박희순, 차승원 등의 배우들은 목적을 위해 등장하면서도 매 씬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마에스트로' 박찬욱은 이번에도 그의 이름에 걸맞은 연출을 보여준다. 그의 미장센, 카메라 워킹, 음악 선곡 등은 말할 필요가 없다. '고추잠자리' 시퀀스의 경우, 호불호는 갈릴 수 있지만 신선한 충격임을 부인할 수 없다. 감독의 말처럼 깨소금처럼 뿌려놓은 유머는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했어' 느낌으로 관객 개개인의 웃음의 허를 찌른다. 또한 보는 사람에 따라서 각자가 집중하는 바가 다르기에 이 영화를 보고 느끼는 감정도 다 다르게 느껴진다. 누군가는 노동시장에 대해, 누군가는 AI시대 인간의 역할에 대해, 누군가는 이 사회 가장의 고뇌에 대해, 누군가는 가족의 무게에 대해, 행복에 대해,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 타인에 대해, 윤리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만수의 치통 같은 불편함이 영화를 보는 내내 느껴진다. 행복을 위해 타인을 너무나 쉽게 무너트리고 그 마저도 블랙 코미디로 치환되는 모습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이 영화는 보는 재미가 있다. 2시간 20분에 육박하는 긴 러닝타임에도, 이를 꽉 찬 배우들의 연기와 눈이 즐거운 미장센 영화적으로 새로운 시도 등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즐거움을 준다. 비슷하지만 조금씩 변주해서 대중들이 좋아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거리'를 던진 영화이기에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올드보이'도 아닌 '헤어질 결심'도 아닌 빽빽하게 꽉 채워서 쓴 산문집 같은 이 영화가 주는 어떤 분명한 울림이 있다. 열심히 살자, 그렇지만 또 너무 열심히는 살지 말자. 행복하자, 그런데 행복은 무엇일까. 이렇게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극장을 나가는 순간까지 이어진다.
9월 24일 개봉. 러닝타임 139분. 15세 이상 관람가.
<저작권자 ©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