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서지는 파도와 눈부신 바닷가에 어울리는 짜릿한 고음과 빠른 비트. K팝 시장에서 '서머송'을 정의할 때 흔히 떠올리는 공식이다.
지금까지 여름을 앞두고 쏟아져 나오던 곡들은 하나같이 대놓고 청량함을 전면에 내세웠다.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마린룩을 입거나 휴양지를 연상케 하는 트로피컬 하우스, 심장을 울리는 강렬한 댄스 음악을 부르는 가수들에게 대중은 '서머퀸', '서머킹'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줬다.
하지만 최근 K팝의 여름 풍경은 사뭇 다르다. 여전히 맑고 시원한 느낌을 주는 곡들이 꾸준히 사랑받고 있지만, 단순히 청량이 다였던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이제 여름철 플레이리스트의 판도는 레트로, 하이틴, 심지어 감성적인 발라드까지 아우르는 다채로운 장르의 각축장으로 변모하며 '서머퀸'과 '서머킹'의 조건 자체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단연 '이지 리스닝' 트렌드와 결합한 레트로, 하이틴 등 다양한 콘셉트의 강세다. 과거의 여름 노래들이 당장이라도 워터파크나 해변으로 달려가야 할 것 같은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산했다면, 최근의 곡들은 잔잔하고 차분한, 선선한 여름밤 산책을 할 때 듣기 좋은 편안하고 세련된 무드를 강조한다.
1990년대나 2000년대 초반의 향수를 자극하는 Y2K 감성의 신시사이저 사운드, 펑키한 디스코 리듬을 차용한 곡들 역시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그루브를 만들어낸다. 여기에 청춘 영화의 한 페이지를 연상케 하는 풋풋한 하이틴 감성이 더해지면서 대중은 억지스러운 시원함보다는 세련되고 기분 좋은 쾌적함을 선택하고 있다.
실제로 여름 음원 차트 최상위권에 장기 집권하는 곡들을 살펴보면 리스너들의 취향이 변화했음을 대변한다. 지난해 7월~8월 한 국내 음원 차트에 따르면, 상위권에는 넷플릭스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 OST '골든(Golden)'을 시작으로 올데이 프로젝트 '페이머스(FAMOUS)', 우즈 '드라우닝(Drowning)', 10CM '너에게 닿기를' 등이 차지했다.


뜨거운 여름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이는 감성적인 발라드나 미디엄 템포 R&B 장르의 선전도 눈길을 끈다. 전통적으로 애절한 발라드는 찬 바람이 부는 가을이나 겨울의 전유물로 여겨졌으나, 이제는 한여름 음원 차트에서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결국 최근 가요계에서 진정한 '서머퀸', '서머킹'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조건은 단순히 '얼마나 시원한가'에 머물지 않는다. 여름이라는 계절이 가진 다양한 매력을 얼마나 다채롭게 풀어내느냐가 관건이 됐다.
찌를 듯한 고음과 청량함은 이제 수많은 무기 중 하나일 뿐, 절대적인 승리 공식이 아니다.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자신만의 독보적인 감성으로 대중의 여름철 일상 깊숙이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아티스트만이 새로운 '서머퀸', '서머킹'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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