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을, 윤여정의 연기를 본다는 건 행운이다(인터뷰)

전형화 기자 / 입력 : 2013.05.08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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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사진=구혜정 기자


봄 햇살이 따가운 5월의 어느 날. 서울 삼청동의 어느 카페에 가디건을 걸친 윤여정이 가느다란 담배를 입에 머금고 앉아 있었다. 올해 나이 만 65세.

때론 시간은 사람의 결을 나이테처럼 두텁게 만들기도 하지만, 종종 짙은 향기를 머금게 한다. 윤여정에게 시간은 주름과 매혹을 같이 선사했다.


윤여정이 앉아 있던 그 자리는 어느 순간 파리의 노천카페로 변할 것만 같았다. TV드라마에서 늘 엄마를 연기했던 윤여정은 사실 어떤 장소든 그녀의 분위기로 빨아들이는 마력을 갖고 있다.

송해성 감독이 9일 개봉하는 '고령화가족'에 윤여정이 필요하다고 삼고초려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윤여정은 엄마지만 앉아 있는 것만으로 여느 엄마와 다르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윤여정이 "어머 칸영화제 이후 1년만이네. 반가워요"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햇빛이 강해 옆자리에서 담배를 피울게요"라며 의자에 앉은 윤여정은 "선글라스를 끼면 눈을 서로 못보잖아"라면서 탁자 위에 선글라스를 내려놓았다.


마침 SBS '힐링캠프'에 출연한 게 화제가 된 뒤였다. 누군가 '힐링캠프'를 보고 트위터에 여자로 태어나 꼭 갖고 싶은 걸 가진 두 사람이 있으니 한명은 이효리, 한명은 윤여정이라고 했다고 하자 "어떡하니, 이효리는 춤도 잘 추는데"라며 호호 웃었다.

남편이 다른 데서 데려온 큰 아들, 배 아파서 낳아서 공부도 잘했지만 영화 망해먹고 놀고 있는 둘째 아들, 남편 몰래 다른 남자 사이에서 낳은 막내 딸. 이런 자식들을 늘 한상에서 밥을 해 먹이는 엄마. 윤여정이 '고령화가족'에서 맡은 엄마다.

스크린에서 홍상수 감독과 임상수 감독을 오가던 윤여정에게 낯선 엄마기도 하다. 자식들이 싸우든 말든 고기만 굽는 엄마. 그저 밥 한 끼 잘 먹이는 게 엄마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마냥 묵묵히 상을 차리는 엄마.

윤여정은 "고민 많이 했어요. 뭐 고기만 굽다가 끝나는 게 아닌가 싶었거든"이라고 말했다. 자식들이 횟집에서 싸울 때 소주 한잔을 입에 털어 넣는 그 장면 때문에 송해성 감독이 캐스팅한 게 아닌가 싶다고 답했다. 윤여정은 "그 장면은 사실 내가 만든 것"이라며 "자식들이 싸우는데 내가 말릴거야, 같이 싸울거야, 그냥 나가라고 하길래 차라리 술을 먹겠다고 했다"고 손을 저었다.

그동안 연기했던 엄마랑 영 다르기에 왜 하셨냐고 물었다. 윤여정은 꼼꼼히 이야기를 꺼냈다. "송해성 감독과 '우행시'를 찍었을 때 수녀를 했거든. 그런데 수녀가 고민하는 장면이 나한테 아주 중요했어요. 절대로 자르면 안된다고 했는데 송해성 감독이 확 편집을 해버린 거야. 이나영이 그 장면에서 연기를 못했나다 어쨌다나하면서. 화가 확 나서 그 뒤론 안봤지."

윤여정은 "송해성 감독한테 내 이름 석자가 우스울지 모르지만 나는 이걸 얻기 위해 고생 많이 했다우라고 문자를 써서 보내려다가 너무 길어서 지워버렸어"라며 깔깔 댔다. 윤여정은 "나중에 누가 나한테 "'우행시'에 강동원 빵 주려 출연했냐고 하더라구"라며 담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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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사진=구혜정 기자


가느다란 손가락, 가느다란 담배, 하얗게 사라지는 연기를 내품으며 윤여정은 "그 뒤로 잊고 지냈는데 누가 송해성 감독이 나한테 전화해도 되겠냐고 하더라구. 어려워한다면서. 뭐 어렵냐고 하라고 했어요"라고 말했다. 윤여정은 "송해성 감독이 '고령화가족'을 하자길래 또 찍어놓고 자르려고라고 해줬다"며 싱긋 웃었다.

"A형이시냐"고 묻자 "아니더라구. B형이더라구"란 답이 돌아왔다. 윤여정은 "인고의 어머니도 아니고, 자기 주장도 없고, 내가 뭘해야 할지 몰라서 거절을 했는데 송해성 감독이 나 아니면 안된다고 계속 이야기하더라구"라고 말했다. 이어 "내가 할 이유를 모르겠다며 사실 딴 사람도 추천했다"며 누가 들을까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했다.

윤여정은 "그래도 누군가 나를 이렇게 필요로 한다는데 한 번 고민해 봐야겠다"며 "원작도 읽고 임상수 감독한테도 상의를 했다"고 말했다. 윤여정은 둘째 아들 역의 박해일이 자기를 추천했다고 해서 문자도 보냈단다. "네가 추천했으니 나 연기방향 좀 잡아주라"며.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연기를 해야할 지 잘 모르겠더라고. 강동원 빵 주러 나왔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번에는 고기만 굽는다는 소리만 듣고 끝나겠더라고. 윤제문이랑 박해일이랑 공효진이 하는 걸 보고 너네는 다 할 게 있는데 나만 걱정이다란 소리도 했어요."

"그랬더니요"라고 하자 "그래서 묻어가는 수밖에 없겠구나라고 했죠"라는 답이 바로 나왔다. 살며시 눈을 들여다보면서 윤여정은 "자식들이 밥상에서 싸우는데 이 엄마는 이 상황을 모르고 고기를 굽는건지, 아니면 싸우든지 말든지 하면서 굽는건지 감이 안와서 임상수 감독이랑 상의도 했어요"라고 말했다.

"임상수 감독이 분석을 잘 하거든"이라던 윤여정은 "임상수 감독이 송해성 감독이 신식엄마가 필요했던 거야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자식들과 40년을 살았으니 싸우나보다. 저 싸움이 어떻게 끝날지 아니깐 다 끝나면 고기를 먹어야지라는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윤여정은 "그 때부터 송해성 감독이 지적하면 받아서 같이 발을 떼야겠구나. 점을 찍고 변신이라고 하는데 그런 변신 말고 조금씩 차이를 드러내면 그게 변신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술 장면도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아직도 연기에 정답이 없는 것 같냐"고 하자 "오래 한다고 다 알면 얼마나 좋겠어요"란 답이 또 바로 돌아왔다. 윤여정은 "혹시 고정된 내 습관이 드러날까 송해성 감독 말을 열심히 들었던 같다"고 말했다.

윤여정은 "공효진 결혼식 장면에 윤제문이 뒤늦게 오는데 정말 눈물이 핑 돌더라. 그래서 송해성 감독에게 그 장면을 따서 써달라고 했다. 그런데 영화보니 없더라"고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윤여정은 "박해일이랑 강가에서 윤제문 이야기 하는 장면도 있는데 또 편집됐더라. 내가 다 기억해놨다"며 싱긋 웃었다.

홍상수,임상수랑 하다가 송해성 감독과 하니 어땠냐고 짓궂게 물었다. 윤여정은 "나이가 들으니 좋은게 비교가 우월이 없어지더라. 사람마다 다 다르니깐"이라고 말했다.

"임상수 감독은 철들고 만난 첫 감독이고 요구가 정확하다. 송해성 감독은 우회적으로 표현을 해줘서 그도 나도 고민하면서 상상도 못했던 걸 발견하게 된다. 홍상수 감독은 한국의 우디 앨런이라고 해야 하나. 인정하고 존중한다. 내 자랑이고 큰 재산이다."

윤여정은 "누가 나보고 머리가 좋아서 임상수, 홍상수를 오간다고 하던데 어릴 때라면 발끈 했을 것"이라며 호호 웃었다. 그러면서 홍상수 감독 지난 영화에도 원래 출연하기로 했는데 "선생님, 찍다보니 시간이 넘었어요. 안 오셔도 될 것 같아요 하더라"며 홍상수 감독 성대모사를 했다.

이어 임상수 감독이 윤여정은 첫 장면부터 영혼과 심장을 내놓는다, 왜냐면 빨리 찍고 가냐하니깐이라고 했다며 깔깔 웃었다. "빨리 찍고 가야지, 그게 프로지. 질문에 답도 빨리 하잖아"라는 말이 덧붙여졌다.

윤여정은 "원래 욕심이 별로 없는데 요즘은 욕심이 생긴다. 세상에 수천수만의 엄마가 있는데 그걸 다 해봤으면 하는 생각을 잠깐 해봤다"고 말했다. "잠깐"하셨냐고 했더니 "깊이 생각한다고 달라지는 게 뭐 있나"란 답이 돌아왔다.

윤여정은 "홍상수 감독이 6월에 시간 되냐는 연락은 왔고. 고현정이 출연하는 드라마 '여왕의 교실'에 교장으로 출연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히트가 뭔지 아나. 원래 출연하기로 했던 홍상수 영화에서 맡은 역할이 교장이었다. 이재용 감독이 소원성취 하셨다고 하더라"며 즐겁게 웃었다.

매력적으로 나이를 먹을 수 있는 것. 그런 사람을 곁에서 볼 수 있다는 것. 윤여정을, 윤여정의 연기를, 계속 볼 수 있다는 건 분명히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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