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칼럼]오디오와 인생(17)

이광수 / 입력 : 2014.02.17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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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구소(현 메타뮤직사운드) 프리앰프 66CB


공장을 큰 곳으로 옮기고, 회사 근처에 직원 점심을 대놓고 먹는 식당이 있었다. 20여명의 직원들이 식사를 하러 가면 언제나 우리 밥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루는 식사를 다 하고 일어서는데 식당 주인이 잠깐 보자고 한다.

오랫동안 식사를 하여왔기 때문에 이 분과 꽤 친하다. 내가 직원들 급료를 주는 날이 되어 돈이 필요해 부탁을 하면 필요한 만큼 쓰고 갚으라고 하며 통장과 도장을 내어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그렇게 신뢰하는 사이고 보니 잠깐 보자고 하는 것은 상당한 의미 이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가 어떤 직원을 지목하면서 말하기를 그 사람이 사장님을 배신할 사람이니 조심하라는 것이다. 나는 왜 그 사람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할까, 생각하면서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다른 설명이나 이유를 말하지 않고, '사장님 내 말을 꼭 잊지말고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개인 회사에서 주식회사로 바꾸고 조금씩 틀이 잡혀갈 즈음에 새로 직원이 들어왔다. 새로 들어온 직원은 직급이 공장장이었는데 다른 회사에 있다가 경력직으로 채용된 사람이다. 당시 전기전자 제조업체는 의무적으로 한 명 이상의 공학사를 두기로 되어 있어 이 사람이 공장장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7년간 회사를 다니던 과장은 부장으로 직급을 올리고 또 과장 한 명이 생기고 사무실에는 이사와 대리 한 명씩 그리고 여직원 그렇게 틀을 갖추고 일을 했다.

사실 이렇게 틀은 갖춰서 일은 하지만 사무실 비용과 20여명의 급료를 지불해주는 것은 참 힘든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자주 생산과 판매를 독려할 수밖에 없고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좀 예민해지는 때가 많이 있었다.


어느날 경인 지방 국세청 직원이 와서 모든 회계자료를 다 가져갔다. 우리는 회계에 대한 모든 것은 세무사에게 기장을 해 별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후 나는 국세심판소를 오가며 3년간의 지리한 공방을 벌여야만 했고 결국 상당한 금액의 세금을 내게 되었다.

어느날 어떤 사람에게서 김 부장한테 전화가 와서 사무원이 전화를 바꿔 주었다. 그날 이후 김 부장에게 전화가 자주 온다. 하루 세네번 씩 매일 온다. 나는 김 부장에게 왜 그 사람에게서 전화가 자주 오냐고 말하고 작업 중에는 전화하지 말라고 그 사람에게 말하라고 했다. 그런데도 전화가 계속 온다.

한번은 내가 전화를 받아 작업 중인 사람에게 자꾸 전화하지 말라고 했더니 '너 이00 죽어 00'

하면서 쌍말을 한다. 전화를 끊고 김 부장을 불러 도대체 그 사람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우물쭈물 대며 아무 말을 안했다. 이런 전화 사건이 있은 후 얼마 있다가 김 부장이 회사를 그만 두겠다고 사표를 냈다.

김 부장은 1986년부터 7년간 나하고 같이 일한 사람으로 애증이 겹쳐 있는 사람이다. 눈이 많이 안 좋으며 키가 적고 체구가 자그마해서 열등감을 많이 가지고 있고 집 형편이 어려워 혼자 벌어 동생과 어머님을 부양하고 있었다. 의지가 부족해서 술을 먹고 나면 끊는다고 하면서 번번이 마시곤 했다.

술을 먹으면 이튿날 출근은 점심이 다 되어 출근을 하는 것이 다반사며, 봉급을 타면 술 마시고 돈을 잃어 버렸다고 미리 가불을 해 달라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밑에 직원들 하고 술 먹고 싸우고 해서 나는 곱지 않은 시선을 그에게 주곤 했다.

하루는 열 살이나 적은 밑에 직원이 부장에게 대들며 반말을 하는데도 부장이 아무 말도 못하고 당하고만 있는 것이다. 나는 밑에 직원에게 손윗사람에게 태도가 왜 그러냐고 그를 꾸짖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래 사람들과 술을 먹으며 많은 실수를 하고 그래서 밑에 직원들이 왕따를 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어느해 추석이 다가올 즈음 나는 내 옷을 사면서 부장도 같이 데리고 가서 양복 한 벌을 사 주었다. 그리고는 좋은 사람 만나서 빨리 결혼을 하라고 하며 헤어졌다.

그 후 2일 있다가 김 부장이 사는 동네에 큰 불이 났다. 동네 전체가 다 탔다. 이 화재는 매우 크게 났기 때문에 신문에도 크게 기사가 났었다. 물론 김 부장이 살던 집도 타 버렸다. 나는 같이 일 하는 사람이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며 속이 상하고 김 부장이 불쌍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사준 옷도 한번 입어 보지도 못하고 없어진 것이 못내 아쉬웠다.

얼마 후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형 아파트를 사 주겠으니 6만원씩 불입금은 네가 내고 살라고. 사실 천만 원 가까운 돈을 지불하는 것은 92년 당시 나에게는 많은 돈이었지만 형편이 그런지라 나는 외면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는 내게 말하기를 거기 계속 있으면 보상금이 나온다고 하면서 안 하겠다고 한다. 그 후 보상금이나 입주권이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사표를 써 가지고 온 것이다.

어느날 한 사람이 와서 내게 말하기를 김 부장이 인천 OO역 근처에 진공관 앰프를 만드는 공장을 차렸다는 에기를 했다. 그러면서 물건이 나와 팔기도 했단다. 나는 내심 놀라기도 하고 조금 괘씸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후 한참 있다가 안 사실이지만 전에 회사로 자주 전화했던 사람이 돈을 대고 앰프를 만들다가 몇 달이 못 돼서 앰프 만드는 것을 접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서 나에게 와서 말해주던 사람이 김 부장이 다시 오면 받아줄 꺼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말하기를 김 부장 마음에 부담이 안 되면 언제고 오라고. 그러나 그는 계속 연락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시간이 많이 지났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식당 주인(여)인 사장님은 그때 어떻게 해서 그런 말을 나에게 했는지 참 궁금하다. 내가 그곳 공장을 다른 곳으로 옮긴 후 그 식당을 찾아가니 마포갈비 이름은 그대로인데 주인은 바뀌어 있었다. 또 우리같이 작은 회사에 왜 세무조사를 했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정말 애증이 겹쳐있던 김 부장은 지금 용인의 어느 요양원에 입원해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따뜻한 날에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한번 찾아갈 마음이다.

/이광수 메타뮤직사운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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