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희 미술감독 "'아가씨' 벌칸상 수상, 실감 안난다"(인터뷰)①

[韓영화 장인 릴레이 인터뷰]

전형화 기자 / 입력 : 2016.06.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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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희 미술감독/사진=김창현 기자


벌칸상. 칸국제영화제에서 기술상에 해당하는 상이다. 2003년에 만들어졌지만 그 이전에도 'Technical Grand Prize'이란 이름으로 스태프의 업적을 찬양해왔다.


수상한 면면도 화려하다. 수많은 거장들의 영화에 참여한 스태프들이 상을 받아왔다. 그 상을, 한국인 최초로 류성희(48) 미술감독이 받았다. 제69회 칸국제영화제에 경쟁 부문에 초청된 '아가씨'는, 감독도 배우도 아닌 류성희 미술감독에게 수상의 영예를 안겼다. '아가씨'를 본 관객들이라면, 박수를 칠 만큼 당연한 결과다.

류성희 미술감독은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예를 전공했던 미술학도였던 그녀가 영화의 길을 걷게 만든 수많은 거장들이 받았던 상이기 때문이다.

미국 AFI (American Film Institute)에서 영화를 공부하던 그녀는, 왕가위의 '동사서독'을 보고 한국행을 결심했다. 남의 것만 같았던 서부극 세트를 만들다가 만났던 '동사서독'은 아시아인으로, 한국인으로, 정체성을 뒤흔들었다. 그 '동사서독'의 미술과 분장을 맡았던 장숙평이, 왕가위의 '화양연화'로 칸영화제 기술상을 받았으니, 자신의 벌칸상 수상이 실감 안 날만도 하다.


류성희 미술 감독이 걸어온 길은, 한국영화 신 르네상스의 발자취이기도 하다. 송일곤 감독의 '꽃섬'으로 시작해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를 지나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과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거쳐,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과 '괴물'을 지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와 '헨젤과 그레텔', '박쥐'와 '마더' '고지전'과 '만추', '변호인', 그리고 '국제시장'과 '암살'에 이어 '아가씨'까지.

작품으로 불리는 영화들과 대작으로 꼽히는 영화들이, 류성희 미술감독의 손 끝을 거쳤다.

처음부터 쉬운 길은 물론 아니었다. 어릴 적 서부극과 주말의 영화를 좋아하는 소녀이긴 했다. 중학교 시절, '대부'를 봤다가 피 뭍은 말 대가리가 나오는 악몽을 꾸곤 했다. 강렬한 이미지에 대한 매료. 그렇지만 그녀의 선택은 홍대 도예과였다. 대학원까지 다녔다. 한국적인 미, 유려한 곡선,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매료됐지만 그럼에도 늘 한 켠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도자기를 만들어도 연작으로 만들었다.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그러다가 데이빗 린치의 '엘리펀트 맨'을 봤다. 많이 울었다. 추하고, 아름다웠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27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엔 늦은 나이였다. 당시 한국영화에는 미술감독이란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이었다. 미국으로 가서 영화를 공부하자고 마음 먹었다.

AFI를 가게 된 건 운명이었다. 같이 토플을 준비하던 친구에게서 AFI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전기가 왔다. 내 운명이야" 싶었다. 이미 접수시간도 지났지만 어찌 어찌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보냈다. 결원이 생겼다. 합격했던 다른 사람이 등록을 취소하면서 그녀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그렇게 영화와 운명처럼 만났다. AFI에 다니면서 틈틈이 단편 영화에 참여하고 돈을 벌었다. 마침 IMF 시절이었다. 살기가 만만찮았다. 풀풀 먼지 날리는 사막에서 서부극 세트를 만들고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그러다가 '동사서독'을 만났다. 눈물이 났다. 임청하의 흐르는 칼날이, 그 의미가, 왠지 알 것만 같았다. 한국에 돌아 가자고 결심했다.

주위에선 다들 말렸다. 한국 영화계에서 미술쪽 일을 하면 굶어 죽거나 현장에서 입 돌아가서 죽는다고들 했다. 입 돌아가서 죽는 한이 있어도 한국에서 죽겠다고 결심했다. "이 에너지를 서부극에 쏟지 말고 한국영화에 쏟자"고 결심했다. 2주 만에 모든 걸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충무로에 아는 사람 하나 없었다. 미술 감독은커녕, 세트 만드는 사람 따로, 분장팀 따로, 그렇게 있던 시절이었다. 일단 명함을 만들었다. 포트폴리오를 들고 영화사마다 찾아갔다. 당시 차승재 우노필름 대표 등 차세대 프로듀서들이 막 왕성한 활동을 시작하던 때이기는 했다.

다들 황당해 했다. 한편으로 가상하게 여기기도 했다. "이런저런 여자가 미국에서 영화 공부 했는데 미술일 하고 싶다고 찾아왔다"는 소문들이 돌기 시작했다. 소문만 돌았다. 일은 안 들어왔다.

그러다가 역시 유학파였던 송일곤 감독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한국영화로 '소풍'을 처음 하게 됐다. 시작이었다.

떠도는 소문을 듣고 류승완 감독에게서 연락이 왔다. 만나서 영화 이야기는 안 하고 타란티노 영화 이야기만 잔뜩 했다. 그도 돈이 없고, 자신도 돈이 없으니 의기투합했다. '피도 눈물도 없이'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류승완 감독은 귀인이었다. 박찬욱 감독을 소개했다. 박찬욱 감독이 봉준호 감독을, 다시 김지운 감독을 소개했다. 한국영화 신세계를 연 감독들과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욕도 무지 먹었다. 미술감독, 프로덕션 디자이너,란 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 "외국물 먹었다고 잘난 척 한다" "네가 무슨 조명을 알아"란 쌍욕들이 날라왔다. 빛이 어떻게 미술에 떨어지는지가, 어떻게 어울려지는지가, 영감에 첫 번째였던 류성희 미술감독에겐, 싸움은 필수였다. 싸우지 않고서는 새로운 길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때는 그런 욕들이 귀에 들리지도 않았어요." 그저 영화란 세계를 어떻게 창조해야 하는지, 그 생각 외에는 다른 게 들어올 여지가 없었다. '올드보이'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두근거렸다. 한국영화를 바꿀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제작비도 별로 없었으니 미술에 쓸 돈도 별로 없었다. 지금이야 '올드보이'지만 만들 때만 해도 근친상간 소재가 되겠냐는 우려가 컸다.

밤새 벽지를 만들었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모습이어야 했다. "그냥 사다 쓰면 되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미술 스태프들이 몇 명이나 그만 뒀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벽지를 본 봉준호 감독이 "이거 빨리 박찬욱 감독님에게 보여주고 컨펌 받아라. 나 같으면 이런 벽지에 배우 세워놓고 연기 안 시킨다"고 했다. 암담했다.

세 버전을 준비해 박찬욱 감독에게 갔다. 파격적인 것, 덜 파격적인 것, 무난한 것. 박찬욱 감독은 고민하다가 "이왕 갈 거면 세게 가야지"라며 가장 파격적인 것을 택했다. 류성희 미술감독은 "나중에 들었는데 박찬욱 감독님이 편집할 때까지 벽지가 맞는지 고민했다더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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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희 미술감독/사진=김창현 기자


류성희 미술감독과 박찬욱 감독의 동행은 그리 출발했다. 류성희 감독은 박찬욱 감독과 작업을 소풍이라고 했다. 엄청나게 꼼꼼하고 세심하지만 같이 소풍을 가듯 만들어내는 작업이라고 했다.

"'올드보이'에서 유지태가 사는 방 세트를 만들어야 했다. 상위 1%라는데 그렇게 만들 돈도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알게 뭐야' 라며 새롭게 만들자고 생각했다. 방에 수로를 만들겠다고 했다. 박찬욱 감독님이 잠시 생각하더니 그러자고 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박찬욱 감독님은 그 수로에서 유지태가 손을 씻는 장면을 추가했다. 그렇게 미술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영화 세계로 끌어 들인다."

'아가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재 세트에 일본 정원을 만들자고 했다. 사실 일본 정원을 세트에 넣으면 돈도 많이 들고 카메라 세팅도 쉽지 않다. 일본 정원과 영국식 도서관이 어울릴지도 미지수였다. 박찬욱 감독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선 그 서재의 주인인 조진웅이 그곳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는 장면을 추가했다. 자신의 세계를, 경건하게 받아들이는 장면을 만들어, 그 미술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영화 세계로 끌어들인 것이다.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건, 미지의 세계를 걷는 건, 먼저 걷는 건, 언제나 힘들다. 봉준호 감독과 '살인의 추억'을 만들 때, 경찰서를 "깊은 우물 같은 느낌"으로 만들어달라던 그와, 실제 경찰서에서 찍고 싶어 했던 그를, 설득 끝에 세트로 만들었다. "따라다라단"이란 음악과 함께 지금도 회자 되는 경찰서에서 짜장면 먹는 바로 그 장소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미술이 꽉 짜인 영화들에 지쳤다. 그래서 김태용 감독의 '만추'를 같이 했다. 시애틀의 마법 같은, 아름다운 공간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땅에 발을 딛고 싶었다. '고지전'을 했다.

'국제시장'은 점점 블록버스터가 돼 가는 한국영화 시스템에 대한 고민으로 참여했다. 독일과 태국 등 해외에서 촬영하고, 시대극이라 세트와 미술에 대한 고민도 같이 해야 했다. 결국은 어떤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냐는 고민을, 현장과 같이 했다. '암살'도 그랬다. '변호인'도 그랬다.

어떤 감독은 류성희 미술감독이 예술가라고 한다. 어떤 감독은 류성희 미술감독을 철저하게 신뢰한다고 했다. 어떤 제작자는 류성희 미술감독이 감독의 의도를 120% 이해한다고 했다. 그런 믿음을 주기까지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언제부터 현장에서 욕을 듣는 일이 줄었냐고 물었다.

"참여하는 스태프 중에서 점점 나이가 많아지면서"라며 웃었다. 열심히, 꾸준히, 잘, 버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답이다.

'아가씨'는 박찬욱 감독과 작업이 늘 그랬듯 결코 쉽지 않았다. 정원 하나하나, 벽지 하나하나, 창살 무늬 하나하나, 서재 세트장은 말할 것도 없었다. 미학적으로 미술이 영화 분위기를 퇴색 시키면 어쩌냐, 는 고민이 수도 없었다. "'아가씨'는 피메일 도미네이트(여성 지배)란 분위기가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야하고 고전적이면서도 곡선적이어야 했다"고 했다. 말이 쉽다. 가짜지만 가짜가 조화를 이뤄야 했다. 가짜가 가짜처럼 보이면, '아가씨'는 빛을 잃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해냈다. '아가씨'에서 미술은 또 다른 주인공이다. '아가씨'로 벌컨상을 받은 건, 대단한 일이지만, 당연한 일이다.

류성희 미술감독은 지금, 영화 작업에서 미술 시스템을 고민하고 있다. 후학들의 불안정한 생활, 직업으로서의 영화 미술일,에 대한 고민을 같이 하고 있다.

류성희 미술감독이 '동사서독'을 보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용기를 얻었던 것처럼, 누군가는 '아가씨'를 보고 영화 미술을 꿈 꿀지 모른다. 그녀는 그런 누군가들이, 직업인으로 이 세계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고민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아직 "벌컨상을 받은 게 실감나지 않는다"며 소녀처럼 웃는다. 웃어라, 캔디야, 들장미 소녀야, 가 문득 생각났다.

#류성희 미술감독이 밝힌 '아가씨' 미술의 비밀②, 류성희 미술감독이 말하는 영화에서 미술이란? ③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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