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 '임시 감독', 원조는 1948년 야구 전설 '이영민'이었다

박정욱 기자 / 입력 : 2024.02.29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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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 감독. /사진=대한축구협회
황선홍 한국 올림픽대표팀 감독이 한국 축구 성인국가대표팀의 '임시 사령탑'을 맡게 됐다. 잠시 동안 두 대표팀을 모두 지휘하며 '투잡' 지도자로 자리한다. 대한축구협회 국가대표전력강화위원회는 지난 27일 제3차 회의를 열고, 3월 A매치(국가대표팀간 경기) 기간에 열리는 태국과 2026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 홈 3차전(21일 오후 8시 서울월드컵경기장)과 원정 4차전(한국시간 26일 오후 9시30분 태국 방콕 라자망갈라 스타디움)을 지휘할 임시 사령탑으로 황 감독을 낙점했다.

정해성 전력강화위원장은 "다음달 월드컵 예선 두 경기를 맡을 임시감독으로 황선홍 올림픽대표팀 감독을 선임하기로 했다. 더불어 6월에 있을 월드컵 2차 예선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적어도 5월 초까지는 정식감독을 선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과거 우리나라는 물론 다른 나라 협회에서도 A대표팀과 23세 이하(U-23) 대표팀을 겸임한 사례가 있다. 황 감독은 아시안게임 우승으로 성과를 보여줬으며, 국제대회 경험과 아시아 팀들에 대한 이해도를 갖췄다"고 선임 배경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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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성 전력강화위원장.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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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 감독. /사진=뉴시스
황 감독은 오는 4월 15일부터 5월 3일까지 카타르에서 열리는 2024 파리 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을 겸한 2024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아시안컵을 앞두고 위기의 한국 국가대표팀을 먼저 살피면서 U-23 대표팀까지 챙겨야 한다.

다소 혼란스럽고 어수선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3월 A매치 기간에 올림픽 대표팀은 사우디아라비아 담맘에서 열리는 친선대회에 출전한다. A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의 일정이 겹친다. 황 감독은 동행할 수 없다. 황 감독 없이 기존 U-23 대표팀 코칭스태프가 올림픽대표팀을 이끌어야 한다. U-23 대표팀도 '임시 체제'를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황 감독은 A대표팀에서 별도의 코칭스태프를 꾸려 다음달 18일 선수단 소집부터 26일 태국과 북중미 월드컵 2차 예선 원정 4차전까지 맡게 된다. 그 뒤 곧바로 U-23 대표팀으로 돌아가 10회 연속 올림픽 진출을 위해 '파리 올림픽 준비 체제'에 돌입한다.

한국 올림픽 대표팀은 총 16개국이 참가해 4개국씩 네 조로 나눠 치르는 U-23 카타르 아시안컵 조별리그에서 우승 후보 일본을 비롯해 중국, 아랍에미리트연합(UAE)과 B조에 편성돼 있다. '죽음의 조'다. 여기서 조 2위까지 올라가는 8강 토너먼트에 진출한 뒤 최종 3위 안에 들어야 파리 올림픽 본선 직행 티켓을 거머쥘 수 있다. 4위는 아프리카 예선 4위 기니와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거쳐 마지막 한 장의 본선 진출권을 놓고 '끝장 승부'를 펼쳐야 한다. 쉽지 않은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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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용 감독. /사진=OSEN
# 꼭 10년 전, 신태용도 '투잡 임시 감독'으로 뛰었다

어느 종목이나 비슷하겠지만, 한국 축구에서도 임시 감독은 위기 상황에서 자주 등장한다. '정식 감독'을 선임하는 과정이나 특정 이벤트 경기를 갖는 시기에 일시적으로 팀을 맡는다. 때로는 '감독대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정식'이 아니고 '임시'로 팀을 맡는다는 측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축구에서 '임시 감독'의 가장 최근 사례는 10년 전인 2014년 9월 2일부터 8일까지 딱 1주일 동안 A대표팀을 지휘한 당시 신태용 감독대행(현 인도네시아 대표팀 감독)이었다. 2014 브라질 월드컵 본선에 출전했던 홍명보 감독(현 울산 HD 감독)이 1무 2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비판 여론에 시달린 끝에 사퇴한 뒤였다. 신태용 감독대행은 당시 차기 국가대표팀의 코치로 낙점됐고 새 감독이 자리에 앉기 전의 일시적 공백기에 임시 사령탑을 맡아 베네수엘라, 우루과이와 두 차례 친선경기를 지휘했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9월 5일 베네수엘라와 친선경기에 앞서 새 사령탑으로 선임됐지만 선수 파악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지휘를 미뤘고, 고양종합운동장 관중석에서 우루과이전을 지켜보면서 취임 인사만을 했다. 그 뒤 곧바로 슈틸리케 감독 체제로 들어가 2015 호주 아시안컵과 동아시안컵, 2018 러시아 월드컵 예선 등을 치렀다. 슈틸리케 감독의 공식 재임기간은 2014년 9월 24일부터 2017년 6월 15일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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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용 인도네시아 축구국가대표팀 감독. /사진=AFPBBNews=뉴스1
신태용 감독은 슈틸리케 감독을 보좌하는 코치로 계속 일했다. 그러다가 이광종 U-23 대표팀의 갑작스러운 사임으로 올림픽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돼 국가대표 코치의 자격을 유지하면서도 2015년 2월부터 2016년 8월까지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예선과 본선을 책임졌다. 황선홍 감독에 앞서 가장 최근에 '투잡'을 경험한 지도자였다.

그보다 앞선 '임시 감독' 사례는 다시 10년 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간다. 2004년 4월 20일부터 6월 15일까지 2개월 동안 대표팀을 맡은 박성화 감독대행이다. 성적 부진으로 물러났던 움베르토 쿠엘류 감독(2003년 2월 3일~2004년 4월 19일)과 조 본프레레 감독(2004년 6월 24일~2005년 8월 23일) 사이의 '임시 감독'이었다. 박 감독대행은 당시 파라과이, 터키와 두 차례 친선경기에 이어 2006 독일 월드컵 예선 베트남전을 이끌었다.

그 다음은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거스 히딩크 감독(2001년 1월 1일 ~ 2002년 6월 30일)이 물러난 뒤 그 해 11월 가진 브라질 초청 친선경기만을 위해 대표팀을 맡은 김호곤 '임시 감독'이다. 11월 3일부터 20일까지 '18일간의 임시 사령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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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 감독. /사진=뉴시스
이번에 황선홍 임시 감독 선임 때 하마평에 올랐던 박항서 전 베트남 국가대표팀 감독도 2000년 말 히딩크 감독 부임 직전에 감독대행을 맡은 적이 있었다. 2014년 신태용과 비슷한 예다. 일본과 원정 친선경기만을 이끈 뒤 새 사령탑으로 선임된 히딩크 감독에게 지휘권을 전달한 뒤 '히딩크호'의 코치로 일했다.

1998 프랑스 월드컵 때는 대회 도중 차범근 감독이 경질되고 김평석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멕시코와 조별리그 1차전에서 하석주가 선제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백태클 퇴장'을 당하면서 수적 열세를 안고 1-3으로 역전패한 데 이어 네덜란드와 2차전에서는 0-5로 참패를 당하자, 차범근 감독은 중도 경질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이어 김평석 감독대행 체제로 치른 벨기에와 3차전은 후반 27분 유상철의 동점골에 힘입어 1-1로 비겼고, 1무 2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며 대회를 마무리했다.

박종환 감독이 대표팀 사령탑을 맡던 1995년(4월 26일~7월 31일)과 1996년(2월 15일~1997년 1월 7일) 사이에는 무려 3명의 '임시 감독'이 계속해 나왔다. 박종환 감독이 1995 코리아컵 4강에서 탈락하고 국가대표 선수들의 음주 비난 여론을 꺼내면서 선수들과 갈등을 빚은 끝에 사퇴한 뒤 국내 지도자들이 국가대표 감독직을 고사하는 비상 사태가 이어졌다. 3연속 임시 감독 선임의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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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무 전 감독. /사진=뉴스1
먼저 허정무 당시 포항 스틸러스 감독이 8월 12일 열린 브라질 초청 친선경기를 위해 1995년 8월 1일부터 12일까지 12일짜리 임시 사령탑으로 나섰다. 이어 당시 전남 드래곤즈를 이끌던 정병탁 임시 감독이 아르헨티나의 명문클럽 보카 주니어스와 친선경기를 위해 9월 16일부터 30일까지 보름 동안 A대표팀을 맡은 뒤, 바통을 이어받아 당시 울산 현대 감독이던 고재욱 임시 감독이 사우디아라비아 초청 친선경기를 위해 10월 20일부터 30일까지 11일간 지휘봉을 잡았다. 1995년에는 8, 9, 10월에 각각 다른 세 명의 임시 감독이 차례로 A대표팀을 이끌었다. 8월의 감독, 9월의 감독, 10월의 감독이 모두 달랐다. 세 명의 임시 감독을 거친 뒤 1996년 봄기운이 찾아오던 2월 박종환 감독이 동정 여론을 얻어 다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복귀했다.





# '임시 감독' 원조는 1948 런던 올림픽의 이영민 감독

한국 축구 역사에서 A대표팀 사령탑으로 가장 앞 자리에 이름을 올린 인물은 박정휘(1908~1985) 감독이다. 박정휘 초대 감독은 경성제대(서울대 전신)에서 라이트백(오른쪽 풀백)으로 활약하며 만주 원정경기를 치렀고 주장을 맡기도 했다. 1945~1947년 하경덕 회장의 5, 6대 집행부 시절부터 1950년대 말까지 조선축구협회와 대한축구협회의 이사로 여러 차례 일했고, 1954~1955년 대한축구협회 이사장, 1957~1959년 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1960년대 중반에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으로 축구 행정에 관여했다.

그는 한국대표팀이 처음으로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국제 무대에 출전한 1948년 런던 올림픽(7월 29일~8월 14일)을 앞두고 그해 6월 축구 국가대표팀 초대 감독으로 선임됐다. 한국은 그해 5월 21일 국제축구연맹(FIFA)에 가입한 뒤 런던 올림픽을 준비했다. 그러나 박정휘 감독은 런던 올림픽에 참가지 못하고 출국을 눈앞에 두고 사퇴해야만 했다. 한국 축구선수단은 감독 없이 장도에 올랐다.

사연은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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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가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참가한 1948년 런던 올림픽 멕시코와 경기 모습. /사진=대한축구협회
한국은 올림픽 첫 출전을 위해 1948년 3월부터 축구 국가대표 1, 2차 선발전을 치러 26명의 선수를 추렸고, 다시 두 차례 최종 선발전을 거쳐 16명의 대표선수를 확정했다. 골키퍼 차순종 홍덕영, 수비수 박규정 박대종 이시동, 미드필더 민병대 이유형 최성곤 김규환, 공격수 우정환 배종호 정남식 김용식 정국진 안종수 오경환 등이다. 감독은 박정휘로 정해졌다. 그러나 대표팀 선발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끊이지 않았고, 선수단 내 반목도 심한 탓에 제대로 된 합동훈련조차 하지 못했다. 선수들은 친분에 따라 삼삼오오 모여 개인 훈련을 하며 대회를 준비하는 지경이었다.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대한체육회는 박정휘 감독을 제외하고 16명의 선수단만 출국할 것을 지시했다. 선수단은 기차를 타고 출발해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간 뒤 다시 여객선으로 갈아타고 중국 상하이를 거쳐 홍콩에 도착했다. 홍콩에서 친선경기를 한 차례 치른 뒤 항공편을 이용해 런던으로 들어갔다. 감독 없는 축구대표팀의 비상 상황에, 한국 올림픽 선수단 본부는 이영민을 '임시 축구감독'으로 임명했다. 한국 축구 역사에서 사실상의 첫 '임시 감독'이다.

아마추어 야구 최고 타자에게 수여하는 '이영민 타격상'으로 잘 알려진 '야구의 전설', 바로 그 '이영민'이다. 이영민(1905~1954)은 1928년 경성운동장(동대문야구장) 개장 이후 첫 홈런의 주인공으로 한국 야구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강타자이면서, 축구선수와 육상선수로도 이름을 떨친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배재고보와 연희전문학교(연세대 전신)에서 축구 선수로 뛰며 전조선축구대회 우승에 앞장섰고 1930년 경평축구 정기전에 공격수로 나서 골도 넣었다. 1933년에는 경평전에서는 경성축구단 감독을 맡았다. 또 1928년 전조선육상경기대회에서는 5관왕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1933년 박승빈 조선축구협회 초대 회장의 제1대 집행부 시절부터 이사로 일하며 초창기 축구 행정에도 관여했다.

대한야구협회 초대 이사장을 지낸 이영민은 야구협회의 시찰단 자격으로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참가했다가, 뜻하지 않게 공석이던 한국 축구대표팀의 감독을 맡게 됐다. 한국 대표팀은 '원조 임시 감독' 이영민의 지휘 아래, 멕시코와 첫 경기에서 최성곤 배종호 정국진(2골) 정남식의 골을 묶어 5-3으로 이겨 사상 첫 A매치에서 첫 승을 챙겼지만, 스웨덴과 8강전에서는 0-12로 대패했다. 스웨덴은 이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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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런던 올림픽 한국과 스웨덴의 경기 장면.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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