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은 없다' 새 외인 사령탑의 자각, 'VNL 27연패' 위기의 여자배구의 해법

페르난도 모랄레스 신임 여자 배구 대표팀 감독이 25일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김연경을 비롯한 황금세대가 떠나고 좋은 시기를 보내지 못한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대한배구협회가 남녀 배구 대표팀 사령탑으로 나란히 외국인 감독을 선임했다. 과거 명성을 잃은 한국 배구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대대적인 리빌딩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여자 배구 대표팀에 더 눈길이 쏠리는 게 사살이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 4강에 올랐던 아시아의 배구 강국은 김연경(흥국생명)과 양효진(현대건설) 등의 국가대표 은퇴와 함께 가파른 내리막길을 탔다.

페르난도 모랄레스(42) 여자 배구 대표팀 감독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여자 대표팀의 갑작스런 추락으로 많은 실망을 한 팬들에게도 반등의 불씨를 보여줘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 속에 지휘봉을 잡았다.

모랄레스 감독은 25일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파크텔 대회의실에서 대한민국 배구 국가대표팀 신임감독 기자회견에서 "(지원 동기는) 한국 여자대표팀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 때문"이라며 "올림픽 수상 이력이 있고 준결승에도 2차례나 진출했다. 그런 자리로 돌아가는데 일조할 수 있다고 생각해 지원했다. 선수들의 열정이 있다면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고 의심치 않는다"고 말했다.


김연경을 위시한 한국 여자 배구 대표팀은 열악한 지원 등에도 그동안 국제대회에서 분투했다. 도쿄 올림픽을 통해 국민들에게 선사한 감동은 배구장으로 많은 팬들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됐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 4강 신화를 이끈 뒤 대표팀에서 은퇴한 김연경. /사진=뉴스1

다만 이후 김연경과 양효진 등이 나란히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고 슈퍼스타를 잃은 대표팀의 국제무대 경쟁력은 급격히 하락했다.

올림픽 이후 세자르 에르난데스 감독을 새로 선임하며 리빌딩을 꾀했지만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 2년 동안 무려 27연패에 빠졌다. 아시아는 물론이고 세계 무대에서도 다크호스로 평가받았던 한국 여자 배구는 어느덧 세계랭킹 40위까지 추락했다.

위기감이 감도는 가운데 세자르 감독이 물러났고 대한배구협회는 모랄레스 감독을 선임했다. 푸에르토리코 대표팀과 다양한 리그에서 세터로 활약했던 그는 푸에르토리코 지휘봉을 잡고 세대교체를 이뤄내며 자국을 세계랭킹 16위까지 끌어올렸다. 지난해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예선전에서도 4승 3패로 선전했다.

이전 감독들과 달리 전임 감독으로 국가대표팀에만 전념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한 이점이다. 국가대표 소집 이외의 기간에는 국내 선수 분석, 유소년 선수 지도, 국내 지도자와의 교류, 국제 배구 동향 연구 등 한국 배구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활동도 이어갈 예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당장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는 점이다. 김연경과 양효진이 물러나며 전력적으로 크게 약화된 건 사실이다. 이는 결과로 고스란히 나타났다. 당장 국제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하긴 어렵다. 다만 그동안 보여준 성과는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발전성도 뚜렷하게 발견하기 어려웠다. 이런 희망을 심어줘야 하는 임무를 안고 대표팀 사령탑에 오른 모랄레스다.

그는 "김연경을 비롯한 황금세대가 떠나고 좋은 시기를 보내지 못한 건 공공연한 사실"이라며 "세대교체를 위해선 적응 과정과 과도기를 거치야 하는데 이미 그 시기를 겪었다. 이를 잘 버텨내고 세대교체를 본격적으로 이뤄낼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VNL에서 27연패에 빠져 있는 여자 배구 대표팀. /사진=뉴시스

김연경은 '배구계의 메시'라는 평가를 받은 'GOAT(Greatest Of All Time)'다. 이 같은 선수의 재림을 기대하긴 어렵다. 모랄레스 감독의 재임 기간 중엔 더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다른 더욱 '원팀 정신'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모랄레스 감독은 "국제대회에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선 모든 가용 자원이 가동돼야 한다. 혼자 40점을 내는 건 어렵다. 득점을 고르게 분포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체격 조건도, 체력이 좋지도 않다"면서 "그렇기에 낮고 빠르게 경기를 풀어감으로써 블로킹 벽이 자리 잡기 전에 공격을 쉽게 풀어가기 위한 과정을 진행 중이다. 현대 배구는 미들블로커와 윙 공격수, 후위공격까지 가담해야 한다. 혼자 40득점하기 어렵기에 모두가 가담하고 빠르게 플레이 해 예측을 어렵게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자신감도 있다. 그는 "김연경 같이 한 선수가 득점하는 게 아니라 팀 스포츠로 풀어가야 한다"며 "푸에르트리코 감독 시절 세대교체를 경험했는데 아베크롬비라는 걸출한 선수가 있었지만 그 없이 경기를 한 적도 있었다. 팀적으로 협심해 그 자리를 메울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국 여자배구에 대한 문제점도 명확히 파악하고 있다. 앞서 지난 15일부터 소집해 훈련을 이어가고 있는 그는 "전술 및 전략적으로 보완할 게 있는 건 분명하다. 이 부분에선 소집일부터 훈련을 시작했다. 특정 부분에선 향상되는 걸 확인했고 계속 훈련에 매진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페르난도 모랄레스 신임 여자 배구 대표팀 감독이 25일 기자회견을 마치고 카메라 앞에서 수줍은 미소를 보이고 있다. /사진=뉴시스

김연경과 같은 슈퍼스타의 탄생을 기대하긴 어렵지만 눈여겨 볼 재능 있는 선수들에 주목했다. 다만 성공적인 리빌딩에 앞서 고참 선수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최고참인 박정아와 표승주와는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며 "감독 교체 상황에서 최고참의 도움 없다면 리빌딩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들이 코트 위는 물론이고 외적으로도 도와줄 부분이 많다. 그렇기에 역할이 중요하다"고 전했다.

이어 "김다인, 정지윤, 이다현 같은 선수는 현대건설에서 통합 우승하고 합류하는데 좋은 분위기를 가져와주고 팀에 긍정적 역할 해주고 있어서 그들도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목표는 뚜렷하다. 모랄레스 감독은 "배구적인 측면에선 세계랭킹을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다. 지금 40위권에 있는데 선수들을 봤을 때 더 나은 자리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랭킹을 올려 세계선수권에 나서고 아시안권에서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갈 것"이라며 "배구 외적으로는 좋은 분위기를 형성해 '대표팀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포부를 밝혔다.

여자 대표팀은 다음달 14일부터 19일까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28일부터 6월 2일까지 미국 텍사스주 알링턴, 6월 11일부터 16일까지 일본 후쿠오카에서 개최되는 2024 VNL에 참가한다. 모랄레스호의 방향성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