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정경호에게 같은 연기란 없다. 최근 병약하고도 까칠한 캐릭터들로 분했던 그는 비슷하지만 다른 연기력을 보여줬다. 정경호의 색깔은 입히되, 그 색감에 조금씩 변주를 줬다. 앞으로는 '벌크업'에도 도전하고 싶다고.
정경호는 2020년과 2021년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리즈에서 까칠하고 예민한 성격을 가진 흉부외과 의사 김준완 역으로 출연했다. 2022년에는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서 에이즈 환자 역을 맡았다.
이번에는 섭식장애를 겪는 일타 강사가 됐다. 지난 5일 종영한 tvN 토일드라마 '일타 스캔들'(극본 양희승, 연출 유제원)를 통해서다. '일타 스캔들'은 사교육 전쟁터에서 펼쳐지는 국가대표 반찬가게 열혈 사장 남행선(전도연 분)과 대한민국 수학 일타 강사 최치열(정경호 분)의 달콤 쌉싸름한 로맨스를 그린 작품이다.
정경호에게 '일타 스캔들'은 거절할 이유가 없는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제작진과 전도연을 향한 신뢰가 컸다고. 그는 "양희승 작가님의 작품을 거의 다 찾아본 거 같다. 가장 최근의 작품까지 재밌게 봤다. 유제원 감독님은 배우 조정석, 김대명과 친분이 있는 분이다. 그래서 선하고 좋으신 분인 걸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무엇보다 전도연 선배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좋은 기회였다. 감히 선택하냐 마냐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전했다.

이번 작품에서 정경호는 전작과 비슷한 느낌의 캐릭터로 등장했다. '1조원'의 가치를 지닌 수학 일타 강사 최치열 역을 맡았다. 최치열은 섭식 장애와 트라우마를 앓고 있다. 예민하고도 까칠한 성격을 가졌지만 속은 정이 많고 따뜻한 인물이다.
다만 최치열만의 차별점이 있었다. 바로 '일타 강사'란 직업이다. 그러나 이는 정경호에게도 낯선 직업이기도 했다고. 정경호는 "사실 '일타'라는 말도 몰랐고 이런 세계도 있는지 몰랐다. 더욱이 수학은 하나도 몰랐다"며 "수학 강사를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일타 강사의 강의도 보고 실제 수학 안가람 강사와도 만났다. 사실 수학이 뭔지를 이해하진 않고 그냥 했다"고 밝혔다.
수학 공식을 익히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그는 "작품에서 12문제 정도 공식에 대해 강의하는 장면이 있다. 그래서 공식을 외우려고 했다. 그런데 판서까지 하려니 정신병 걸릴 정도로 짜증이 나더라. 안 써지지만 그냥 계속 쓰려고 했던 거 같다"며 "특히 학생들을 보면서 칠판을 쓰는 게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정경호는 곧 최치열에게 녹아들었다. 그와의 공통점을 발견했기 때문. 그는 "일타 강사들은 쉽게 말해 우리 연예인과 똑같더라. 가십의 대상이고, 방송 후기를 찾아보듯 강사들의 강의 후기들도 많이들 찾아보더라. 또 최치열은 개인 시간도 없었다. 유일하게 하는 것이 수학 문제 연구하는 거였다. 돈을 많이 벌지만 쓸 곳도 없어 보이고, 휴가도 없는 삶을 살더라. 그런 그에게 '뭐가 행복하니' 물어보면 '강의할 때 학생들이 끄덕끄덕할 때'였다. 연예인도 사랑을 크게 받든 못 받든, 우리를 본 사람들이 '좋았다' 하면 만족감을 느끼는 것과 같더라"고 전했다.
최치열에게 인간적인 매력도 불어넣었다. 정경호는 "사실 최치열은 자기만 아는 일타 강사다. 직업적으론 최고이지만,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집에선 덩그러니 혼자 있다. 그래서 작가님, 감독님이랑 얘기할 때 최치열의 인간적인 모습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다. 특히 내가 잘할 수 있는 '하찮미'(하찮은 매력)을 첨가하면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나다움을 잘 살려내려고 했다"고 말했다. 병약하고 허약한 모습도 자주 보여줬다. 넘어지는 것은 최치열의 일상이기도 했다. 정경호는 "후시 녹음을 하는데 넘어지는 호흡만 따는 경우도 있었다"고 유쾌한 일화를 털어놨다.
지금까지 주로 허약한 캐릭터를 연기한 그는 이제 '벌크업'이 필요한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런 역할이 들어왔으면 좋겠지만 갑작스럽게 되지는 않을 거 같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정경호는 '일타 스캔들'에서 전도연과 로맨스 연기를 펼쳤다. 전도연은 극 중 핸드볼 국가대표 출신인 반찬가게 열혈 사장 남행선 역으로 출연했다.
최치열과 남행선은 운명으로 이어져 있다. 최치열은 과거 남행선의 엄마 정영순(김미경 분)이 운영하던 고시 식당 단골이었다. 정영순은 최치열이 어려움을 겪던 시절 따뜻한 한 끼를 먹을 수 있게 챙겨준 은인이었다. 시간이 흘러 최치열은 남행선이 정영순 딸인 걸 알게 됐다.
정경호는 이러한 운명적인 만남, 또 이로 인한 이끌림을 잘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또한 널따란 집에 외로이 살던 최치열이 따스하고 아늑한 남행선 가족에 스며드는 모습, 그리고 최치열의 변화도 작품에 그려내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일타 스캔들'은 최치열과 남행선의 로맨스만을 다루지 않는다. 쇠구슬 살해 사건의 범인을 찾는 과정도 그려내며 일명 '쇠구슬 스캔들'이란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이에 정경호도 나름 아쉬움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최치열과 남행선 연애 이야기가 짧은 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 연애라는 게 하기 전까지가 재밌고, 하고 나면 재미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단 쇠구슬 범인을 처리해야 하니 그 사건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 거 같다. '그 인물이 왜 그랬을까'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대배우 전도연과 호흡은 어땠을까. 정경호는 "전도연과의 호흡은 안 좋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영광스러웠던 작업이었다"고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경호는 전도연의 상대 배우였지만 그의 팬이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전도연 선배님은 모르시겠지만, 우리의 투샷이 잡히면 감독 옆에 서서 다시 돌려보고 그랬다. 동경해 왔고, 좋아했던 사람과 연기를 한다는 거 자체가 영광이었다. 촬영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너무 좋았다"고 밝혔다.
전도연과 함께 호흡하며 깨달은 점도 많았다고 했다. 특히 변하지 않는 것의 가치를 알게 됐다고 했다. 정경호는 "약 20년 동안 연기 생활을 해오면서 빠른 변화의 흐름에 맞춰 연기를 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배님과 연기를 하며 변하지 않은 것도 강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누구나 가슴속에서 기억되고 있는 웃음, 울림, 호흡 등이 강점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사실 나는 요 근래 예민하고 까칠한 역할을 많이 하다 보니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 최치열을 보니 이전과 다름이 느껴졌다. 그 이유가 내가 해왔던 시간이 있어서인 거 같다. 나름 단단해졌고, 그동안의 일들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됐다. 그저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변화해 온 거 같다"며 "전도연 선배님과 호흡하며 '이러한 것들이 나쁘지만은 않구나'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정경호는 현실에서도 로맨스를 그리고 있다. 그는 2012년 걸 그룹 소녀시대 멤버 겸 배우 수영과 연애를 시작했고, 2014년 공식적으로 연애 사실을 인정했다. 두 사람은 11년이란 긴 세월을 함께했다.
수영도 '일타 스캔들'을 재밌게 봤다고 했다. 정경호는 "수영은 나를 제일 잘 아니 '(최치열이) 오빠답네'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하지만 서로의 연기에 대해 평가는 하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정경호는 "수영과는 사실 일 얘기를 잘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 연기하는 걸 이야기하는 건 좋아하지만 서로의 연기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는다"며 "물론 서로의 작품은 다 보긴 한다. 그런데 평가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일타 스캔들'은 가족적인 이야기, 달콤한 로맨스,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가 담겨 있다. 또 배우들이 그려낸 살아있는 캐릭터도 담겼다. 이는 정경호가 생각한 '일타 스캔들'의 인기 요인이기도 하다.
시청률조사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일타 스캔들'은 최종회에서 자체 최고 시청률인 17%(전국 유료가구기준)를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이와 관련해 정경호는 "촬영 시작할 때부터 시청자 여러분한테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다짐이 있었다"며 "많은 관심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주변의 반응으로부터 이번 작품의 인기를 실감하기도 했다고. 정경호는 "'일타 스캔들' 시작하며 많은 분들께 '재밌다'고 연락이 왔었다"며 "유별나게 연락이 많이 왔던 작품인 거 같다"고 털어놨다.
'일타 스캔들'을 잘 끝마친 정경호는 또 '열일'을 이어간다. 그는 오는 4월 영화 '보스'(감독 라희찬) 촬영에 들어간다. '보스' 촬영 전까지는 충전의 시간을 가지려 한다. 그는 "쉬지 않고 해왔고, 다양한 역할을 맡아와서 그동안 성장해 온 거 같다. 그런데 이건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거 같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많고 단단해져 있는 상태에서 다양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혜진 기자 hj_622@mtstar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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