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니 8집 'THE SIN : BLISS' 지난 21일 발매 6곡 본편·4개 언어 내레이션판 분리한 영리한 구성

같은 앨범이 다섯 장 떠 있다. 오류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꽤 영리한 배려다. 엔하이픈(ENHYPEN)의 미니 8집 'THE SIN : BLISS'(더 신 : 블리스)를 음원 플랫폼에서 찾아보면 표지는 같고 상단 제목의 색만 다른 앨범들이 나란히 나타난다.
노란 글씨의 앨범에는 여섯 곡만 담겼다. 흰색은 한국어, 주황색은 일본어, 빨간색은 중국어, 초록색은 영어 버전이다. 각 언어판에는 '속보', '사랑의 잔해', '최후의 순간', '가려진 진실' 등 네 개의 내레이션 트랙이 추가돼 총 10곡으로 구성됐다.
전작 'THE SIN : VANISH'(더 신 : 배니시)는 여섯 노래 사이에 다섯 개의 내레이션을 끼워 넣었다. 뱀파이어 연인의 도피 사건을 탐사보도처럼 풀어낸 발상은 독특했지만 설명이 음악보다 앞서면서 듣는 이의 상상력을 제한했다. 곡에 몰입할 만하면 다시 등장하는 목소리 탓에 음악이 서사를 위한 배경음처럼 밀려나는 순간도 적지 않았다.
이번 분리가 당시 반응을 의식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노래만을 위한 자리를 만드니 듣기가 한결 편안해졌다. 이야기 전체를 따라가고 싶은 사람은 내레이션판을, 음악에만 집중하고 싶은 사람은 노란색 본편을 들으면 된다. 내레이션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음악을 그 안에 가두지 않는 절충점을 찾았다.

특히 말을 걷어낸 여섯 곡만으로도 이야기가 충분히 읽힌다. 금기를 깨고 도피한 뱀파이어와 연인이 거듭된 위기 끝에 함께하는 순간 자체가 축복임을 깨닫는다는 서사는 각 곡의 온도 변화만으로도 또렷하다. 따뜻한 출발은 불안과 갈등, 해방과 반격을 거쳐 찬란한 회고로 끝난다.
그 서사는 지난 3월 메인보컬 희승이 탈퇴한 뒤 여섯 명으로 다시 출발한 엔하이픈의 현재와도 묘하게 겹친다. 공식적으로는 연인의 이야기지만 위기 속에서 손을 놓지 않고, 어떤 결말이 오더라도 함께하는 것 자체를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흐름은 팀의 변화와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의도된 자전적 서사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발표 시점이 음악에 또 하나의 의미를 더한 것은 분명하다.
첫 곡 'Two Fools'(투 풀스)는 희망과 무모함을 동시에 품고 앨범의 문을 연다. 경쾌한 컨트리 팝 록과 벅차오르는 후렴은 둘만 있으면 무엇도 두렵지 않다는 낙관을 밀어 올린다. 그러나 두 사람을 '바보들'이라고 부르는 제목에는 행복을 바라보는 제3자의 불안한 시선이 숨어 있다. 가장 환한 곡이면서 곧 닥칠 위기를 이미 알고 있는 서늘한 프롤로그다.
내레이션판에서는 이어지는 '속보'가 평화를 깨뜨리지만, 여섯 곡 본편에서는 'Stuck'(스턱)이 그 역할을 음악으로 대신한다. 따뜻한 기타가 시네마틱한 신스와 거친 비트로 급전환되는 순간만으로도 추격이 다시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이 도피가 자신의 이기심에서 시작된 것은 아닌지 자책하면서도 상대의 손을 놓지 못하는 마음은 제목 안에서도 이중으로 작동한다. 궁지에 갇힌 상태인 동시에 서로에게 단단히 붙들린 관계다.
'Bad For You'(배드 포 유)는 부드럽고 감미롭지만 안쪽이 미세하게 뒤틀려 있다. 상대를 걱정시키지 않으려 불안을 숨긴 선택이 오히려 거리와 오해를 만드는 역설을 호흡 섞인 보컬과 넓은 여백으로 담았다. 매끈한 표면 아래 번지는 균열을 들려준다.

타이틀곡 'Bloody Paradise'(블러디 파라다이스)는 그 균열을 난데없는 축제로 뒤집는다. 피와 낙원이라는 상반된 단어를 충돌시키고 추격의 밤을 둘만의 댄스 플로어로 바꾼다. 브라질리언 펑크의 거친 킥과 파열음, 일렉트릭 기타의 왜곡된 질감은 위기와 해방감을 한꺼번에 밀어붙인다. 후렴은 복잡한 전개 대신 짧고 반복적인 구호로 흥을 끌어올린다. 짧은 곡 길이는 다소 아쉽지만 열기가 식기 전에 달아나는 연인의 상황과는 절묘하게 맞는다.
'Checkmate'(체크메이트)는 축제가 끝난 자리에 전투의 추진력을 채운다. 테크노 비트와 인더스트리얼 사운드가 쉴 틈 없이 몰아치며 앨범에서 가장 높은 긴박감을 만든다. 마지막 'Highlight'(하이라이트)는 올드스쿨 힙합의 짙은 색으로 결연하게 피날레를 장식한다.
여섯 곡 모두 서로 다른 장르와 온도를 지녔지만 하나의 여정처럼 단단하게 이어지고, 각자의 목소리를 고르게 앞으로 내세워 새로운 균형을 완성했다. 덕분에 희승의 빈자리는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함께하는 지금이 곧 축복이라는 결론은 도피 중인 연인뿐 아니라 변화 속에서 다시 결속한 엔하이픈의 다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기자간담회에서 "멤버 수를 생각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결과물이 더 잘 나올 수 있을지에만 집중했다. 커리어 최고 앨범"이라고 말했던 엔하이픈은 말 그대로 숫자의 변화보다 음악의 완성도로 답했다. 여섯이 된 이들은 그 음악으로 다시 나아갈 이유까지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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