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년에 두세 차례 한국을 찾는 재중동포 장률 감독에게 이번 방한은 대단히 영화적이었다. 오는 24일 개봉하는 영화 ‘망종’ 홍보차 7일 오전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장률 감독은 부랴부랴 내한을 취소하는 전화를 한국 제작사측에 걸었다. 바로 여권 분실 때문.
그런데 이날 오후 장률 감독은 부인과의 집안 대수색 끝에 여권을 겨우 되찾았다. 전날 집에 놀러온 딸 친구가 딸의 인형 속에 여권을 넣어놨다가 깜박 잊고 그냥 귀가해버린 것.
가까스로 8일 오전 중국을 출발해 한낮에 한국 땅에 도착한 장률 감독은 전혀 초조한 기색이 없이 아주 느긋했다. 장 감독 말을 그대로 옮기면 “여권을 잃어버리니까 오히려 마음이 더 편했다”고. 장 감독은 다소 느리지만 한국말로 인터뷰를 했고 다소 복잡한 이야기만 중간중간 통역의 힘을 빌었다.
한중합작영화 ‘망종’은 장 감독이 지난 2004년 5~6월 절기 망종을 즈음해 21일간 찍은 작품. 아들 하나를 둔 조선족 여성이 김치를 팔아 고단하게 살아가는 삶을 그렸다.
첫 장편영화 ‘당시’에 이어 등장인물들이 말수가 정말 적다는 지적에 장 감독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통 그렇게 산다. 여주인공 최순희는 말을 많이 할 만한 환경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어 “그녀는 중국 주류사회가 아니라 조선족 출신이다. 다시 말해 그 사회의 아웃사이더에 속한다. 즉 중심과 아웃사이더의 구분은 바로 말수다. 항상 중심에 서면 말이 많아지고 자신의 것을 주장하게 마련”이라고 설명했다.
망종 절기는 보리수확과 벼씨파종이 겹쳐서 농촌에서 연중 가장 눈코뜰새 없는 시기. 고생스럽고 노곤하지만 싹을 심으며 꿈을 예견하기도 한다. ‘망종’에서 미모의 최순희는 살인죄로 감옥에 가 있는 남편이 있지만 아들 창호를 키우며 삶의 희망을 응시한다.
극중 문을 통해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이 전작과 겹치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라고 말에 장 감독은 적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줄 알았단다.
“사실 놈팡이 생활을 한 10년 하면서 거의 밖에 나가지 않고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봤다. 밖에 나가면 못 살 것 같았던 시간이 있었다.”
집에서 애 키우며 장보며 그냥 머리를 비우고 아무 생각없이 살고 싶었던 기나긴 시절이 영화 감독이 되기 전 그에게 있었다.

그래서인지 장 감독의 영화는 주로 실내 신이 대세를 이룬다. 장 감독은 “아무리 나가봤자 별 것 없다”고 덧붙인다. 좀더 세차게 질문공세를 해댔다. 중화민족대 무용과 교수인 부인이 싫어하지는 않았냐고.
장 감독은 “내가 집에서 살림하는데 어느 여자가 싫어하겠느냐? 돈을 번다는 것은 중심에 선다는 것이다. 집사람이 그 권리를 쥐니까 오히려 좋아했다“며 그 얘기는 그만하자며 말을 아낀다.
영화를 통해 자칫 조선족 여성 대부분이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고 오인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주로 한국이나 중국에서 받는 질문이다. 유럽에서는 이런 질문을 덜 받는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한 프랑스 관객이 영화 관람 후 바로 내 삶이라고 했다. 민족을 떠나 보편적인 상황으로 이해해달라”고 주문했다.
장률 감독은 1962년 중국 지린에서 태어나 옌벤대 중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0여년간 작가로 활동하다가 영화감독으로 입문해 지난 2002년 첫 단편영화 '11세'로 베니스국제영화제 단편영화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지난해 ‘망종’은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ACID(프랑스독립영화배급협회)상, 페사로국제영화제 뉴시네마 부문 대상,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대상을 휩쓸었다. 첫 장편 '당시'는 전직 소매치기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당시 관련 TV프로그램을 보며 폐쇄적으로 살아가는 생활을 그린 작품.
장률 감독은 한국과 중국 어느 쪽에 더 끌리는지 묻는 질문에 여전히 불편해했다. “나는 이쪽이다 저쪽이다 생각 없다”는 말로 일축했다. 한국 엔터테인먼트 기사를 자주 검색해 본다는 고백에 ‘8월의 크리스마스’의 심은하를 인상 깊게 봤다는 지난해 인터뷰를 떠올리고 그녀의 결혼과 출산소식을 아는지 물어봤다.
장 감독은 “나에게 미리 말을 안 해 줘 몰랐다.(웃음) 그런데 내가 변했는지 요즘에는 (모든 여배우들이) 다 좋다”고 농을 했다. 또 이번에는 한국음식을 실컷 먹고 가야겠다며 맛난 김치 추천을 장난스럽게 부탁했다.
한편 장 감독의 차기작은 서정 주연의 한국 몽고 합작영화 ‘히야쯔가르’. 중국과 몽고 국경 근방에서 초원의 사막화를 막기 위해 애쓰는 남자와 아들을 둔 조선족 출신 여성의 사랑을 그릴 계획이다. <사진=박성기기자 musict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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