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와 극작가로 명성을 날렸던 안톤 체호프는 말했다. 이야기에 총이 등장하면 반드시 발사돼야 한다고. 이야기에 군더더기가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초반에 중요한 대사나 도구, 설정 등을 소개하고 나중에 매우 중요한 장치로 써먹어 독자나 관객이 초반을 되돌아보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영화 '설국열차'는 체호프의 총을 충실히 따른 영화다.
사람, 상황, 도구, 대사가 열차 꼬리칸부터 맨 앞칸까지 모든 게 연결돼 있다. 잔인하고 아름답고 우아하게 이야기를 배반한다. 기대를 갖게 하고, 상상하게 하고, 그 상상을 배반한다. 단순한 이야기이기에 상황마다 쉼표와 느낌표, 물음표를 던져 전체를 풍성하게 만든다.
널리 알려졌듯이 '설국열차'는 봉준호 감독이 프랑스 원작만화를 보고 빙하기에 살아남은 사람들을 기차에 태워 달린다는 설정에 반해 출발한 영화다. 송강호와 고아성을 비롯해 크리스 에반스, 에드 해리스, 존 허트, 틸다 스윈튼, 제이미 벨, 옥타비아 스펜서, 이완 브렘너 등 할리우드와 영국의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했다. 430억원이라는 미국에서는 중저예산이지만 한국에서는 초유의 제작비로 만들어졌다.
22일 서울 왕십리CGV에서 열린 '설국열차' 기자시사회는 발 디들 틈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영화 한다는 사람들, 영화 하고 싶은 사람들, 영화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이 우르르 찾았다. 그만큼 '설국열차'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뜻이다.
2014년, 그러니깐 바로 내년. 세계 각국 정상들은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환경단체의 반대를 무릎 쓰고 하늘에 인공 냉각제 CW-7을 뿌린다. 어리석은 인간을 비웃듯 이 냉각제로 세계는 얼어붙는다. 철도왕 윌포드가 만든 기차에 탑승한 사람들만 살아남아 전 세계를 17년 동안 끝없이 맴돈다.
1001칸으로 만들어진 설국열차에는 선두칸부터 꼬리칸까지 계급으로 나뉜다. 앞쪽칸은 술과 마약에, 스테이크를 즐기며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반면 꼬리칸은 철저한 탄압을 받으며 압제에 시달린다. 꼬리칸의 젊은 지도자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오래 준비해온 폭동을 일으킨다. 커티스는 동료들과 열차 보안설계자 남궁민수(송강호)를 찾아 기차 전체를 해방시키기 위해 절대권력자 윌포드가 있는 맨 앞쪽 엔진칸을 향해 질주한다. 그들 앞에는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기다리고 있다.
봉준호 감독은 열차를 하나의 세계로 창조했다. 많은 사람들이 있고, 누군가는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고 질서를 지키라고 강조한다. 다른 쪽에선 누군가가 햇빛을 보지도 못하며 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먹고 마시고 즐긴다. 절대 권력자가 있고, 그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있고, 대항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 직접적인 우화다. 봉준호 감독은 직접적인 우화에 더 많은 이야기를 담기 위해 수많은 총들을 준비했다. 각 총들은 매 칸을 전진할 때마다 발사된다. 이 총알은 그러나 예상을 웃도는 다른 과녁에 도달한다. 기대를 배반하고, 그 배반은 또 다른 이야기를 낳는다. 이 이야기는 끝까지 직진하는 듯 하지만 돌고 돈다. 거대한 순환을 만든다. 빈총은 빈총이 아니며, 마약은 마약이 아니다. 믿었던 지도자와 열차의 독재자는 동전의 양면이다. 이야기 속에 반전을 주면서 다시 반전에 여지를 둔다. 불친절할 수 있지만 그만큼 관객에 상상의 여지를 준다.
그래서 '설국열차'는 우화를 위한 우화다.
그동안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은 직접적이었다. 관객에 즉각적인 즐거움을 주고, 극장 문을 나설 때 흥분을 안겼다. '설국열차'는 직접적이되 더 많은 여지와 흥분을 준다. 영화 초반 봉기를 일으켰을 때 벌어지는 혈투, '설국열차'가 아니라 '혈국열차'라고 불러도 될 만큼 쏟아지는 피들은 그 만큼 잔혹한 인생사를 드러낸다. 혁명은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던가. 철저한 파괴가 있어야 탄생이 있다는 걸 봉준호 감독은 설명 대신 영상으로 보여준다. 영화적인 쾌감이 따른다. 봉준호 감독의 액션이라니.
'설국열차'는 폭력을 전시하고, 충격을 주고, 새로운 광경으로 인도하다가 충격적인 결말, 그리고 새로운 미래로 관객을 이끈다. 꼬리칸에서 앞칸으로 나갈수록 신기하고 기이하고 아름다운 볼거리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볼거리 속에서 이야기는 나아가고, 또 배반한다. 이야기는 차갑고 뜨겁다.
봉준호 감독의 조크는 여전하다. 아니 한층 나아갔다. 말과 상황으로 풀어내던 유머 대신 시퀀스 자체를 조크로 만들었다. 상류층 자제들의 교실칸 장면은 그 자체가 유머다. 세계 관객을 대상으로 해서 한국식 유머를 자제 했다기보단 작정하고 조크를 영화 전반부와 후반부에 쉼표로 박아 놨다. 전작의 장점을 답습하기보다 거칠어도 밀고 나가는 걸 택한 듯 보인다.
얼어붙은 세계와 수족관 등 CG도 좋지만 무엇보다 칭찬해야 마땅한 건 촬영이다. 좁은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좁지 않게 담기 위해 카메라는 나아가고 들어가고 돌아가고 올라간다. 홍경표 촬영감독의 공력은 세계에 자랑할 만하다. '프로메테우스' '하트로커' 등에 참여한 마르코 벨트라니가 담당한 '설국열차' 음악은 칸마다 소리에 색깔을 더한다.
틸다 스윈튼의 연기는 압권이다. 열차 2인자를 맡은 그녀는 '설국열차'에 자랑이 될 것이다. 크리스 에반스는 '캡틴 아메리카'보다 '설국열차'를 더욱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을까 싶다. 틸다 스윈튼, 제이미 벨, 존 하트 등 영국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인다. 송강호는 송강호스럽게, 고아성은 고아성다운 뉘앙스를 풍긴다. 틸다 스윈튼과 송강호를 한 영화에 출연시킨 봉준호. 한국영화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봉준호 감독은 '설국열차'를 돌고 도는 불교 같은 세계관에 유일신 사상을 태워 달리듯 만들었다. 스파르타쿠스 같은 피 넘치는 반란과 '매트릭스'처럼 만들어진 운명, 그리고 저항. 이 세계는 잔인하고 우아하고 아름답다. 다른 세상처럼.
8월1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피가 난무하는 '설국열차'가 15세 이상 관람가라는 건 앞서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은 영화들 상당수가 15세 이상 관람가를 받았어야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잣대도, 줏대도 없는 영등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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