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경성학교-사라진 소녀들'(감독 이해영·제작 청년필름 비밀의화원)의 엄지원(38)은 강력하다. 일제 치하 1930년대의 외딴 산골에 위치한 여학생 기숙학교가 영화의 무대. 엄지원은 교장 사나에 역을 맡았다. 친절한 미소를 띤 아름다운 여자는 서늘한 여성미를 뿜으며 극 전반부를 장악한다.
직접 만난 엄지원은 한번 들으면 잊기 힘든 비음 섞인 목소리에 사랑스러운 미소를 잃지 않는 센스쟁이였지만, 영화에선 전혀 다른 모습이다. 물 흐르는 듯 한 일본어, 완벽한 라인을 그리는 붉은 립스틱, 마지막 순간까지 꼿꼿함을 잃지 않는 자세는 촬영이란 전쟁터에 나가는 여배우의 무기처럼 느껴질 정도다.
몇몇 대목엔 "자막이라도 달고 싶다"며 앓는 소리를 하던 그녀는 단호하게 "구색 맞추기에 필요한 사람을 많이 해왔다. 그렇지 않게 보이기 위해 알지 못하는 싸움을 늘 해왔다"고 말했다.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최선을 다한 그녀의 싸움에 고개를 끄덕이리라.
-'경성학교'는 어떻게 봤나.
▶저는 좋았다. 리포트를 제출했으니 점수를 기다리는 학생의 마음이다.
-날카로운 악역 이미지가 신선했다.
▶악역을 애써 찾지 않았다. 이야기를 듣고 감독님한테 농담으로 '난 소녀 하고 싶은데, 소녀는 안 시켜주니까 교장 할게' 그랬다. 그런데 진짜 날 교장으로 쓴다는 거다. '알았어요, 할게요' 그랬는데, 회사에선 '조연은 안돼요' 야단이 났다. 후에 읽어보니 악역이었다. 한 번도 안 해본 것이기도 하고, 재미있게 풀어볼 수 있는 여지가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감독님과 신뢰도 있었고. 그래서 선택했고 열어보니 이 모습이다. 제가 보여주지 않으면 시나리오가 안 온다.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면 다양한 역할이 주어지지 않을까 생각도 했다.
-갑옷 같은 완벽한 메이크업과 화장이 인상적이다.
▶전작이 '소원'이라 옷도 막 입고, 헤어·메이크업에 5분도 안 걸렸다. 그러다 헤어·메이크업만 3시간을 하는 작품을 하다 보니까.(웃음) 시대물의 매력을 알게 됐고 잘 맞는다는 것도 알게 됐지만 3시간씩 앉아있다 보면 정말 중간에 일어나고 싶다.
-몸매를 드러내는 의상 탓에 관리에도 신경을 써야 했을 텐데.
▶몸매보다 교장이란 인물의 여성성, 섹시하고 우아한 느낌이 부각되길 바랐다. 집에 있는 빨간 립스틱을 다 가져갔을 정도다. 개인적으로는 '관상'의 이정재 선배님에게 영감을 받았다. 딱 등장했을 때 존재감이 있었으면 했다.
그런데 '소원' 찍고 난 바로 다음이라 살을 많이 못 뺐다. 지금보다는 살이 좀 있었다. 감독님이 '왜 지금 와서 날씬한 거냐'고 막 뭐라고 했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웃음)

-교장의 비주얼은 그 자체가 인물을 드러내는 느낌인데. 감정선도 극적이다.
▶건축으로 치면 설계도를 촘촘히 그렸던 것 같다. 인물이 발톱을 숨기고 있다가 촥 드러내는 장면에서는 이런 의상이면 좋겠다 하며 구상했다. 그래서 초반에는 하늘하늘하고 베이지 톤이었던 의상이 점점 무채색이 되고 입술 색깔도 점점 짙어진다. 제가 가진 비음 톤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드라마틱하게 그렸다. '여기선 이렇게 갈 거야', '여기선 춤추는 것처럼 연기를 할 거야' 막 설계를 했다. 그 과정이 재미있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캐릭터들을 많이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쁘게 보였다가 미친 여자로 보이는 기회가 흔치 않다. 폭발하는 감정을 유지하는 게 힘들다기보다 재미있었다.
-연기할 때 늘 자제했던, 자연인 엄지원 특유의 비음을 듣는 게 신선했다.
▶연기할 때 쓴 적이 거의 없다. 너무 특색 있는 목소리라 이런 톤으로 검사 역할 하고 미혼모 역할 하면 관객들이 캐릭터를 받아들이는 데 해가 된다. 제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이번엔 마음껏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교장이 어떤 사람인지, 그의 과거는 어떤지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스스로는 교장을 어떤 인물이라 생각했나.
▶비중 상 친절할 수 없어서 제가 인물을 훨씬 더 많이 알아야 했다고 생각했다. 저는 그녀가 시대를 잘못 태어난 비상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당시 조선인 여자가 직업조차 갖기 힘들었던 시기에 전문적인 일을 하고 일본어와 한국어 모두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하지만 나약한 조국을 떠나 기회를 주는 땅으로 가고 싶었던 잘못된 열망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엔 스태프도 불쌍하다고 막 울었다.
-일본어 연기가 유창했다.
▶'주홍글씨' 때 첼리스트처럼 보이고 싶어 정말 열심히 연습하고 결과물에 나름 만족했었다. 그랬던 것처럼 일본어도 제2외국어가 아니라 자유자재로 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공을 많이 들였다. 매일 아침부터 일본 드라마를 '정주행' 했다. '내가 영화를 찍는데 왜 이렇게 드라마를 보고 있지' 할 정도였다. 나중엔 자막 없이 대사가 들릴 정도였다. 일본어 선생님이 계셨지만 그분이 내게 연기를 가르쳐 줄 수는 없지 않나. '선생님, 읽어주지 마세요, 연기하지 마시고 제가 맞는지 틀렸는 지만 말해주세요'라고 하곤 했다. 배우들이 어떤 감정으로 연기하는지 보고 싶었다. 실제로도 많이 도움이 됐다.
-무슨 '일드'를 봤나.
▶기무라 타쿠야가 나온 걸 많이 봤다. '롱 베이케이션', '러브 제너레이션', '히어로', '하늘에서 내리는 1억 개의 별'…. 쫙 보는데 그냥 그 배우의 연기를 보는 맛이 있더라. 잘생겼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었는데 뒤늦게 그 매력에 깜짝 놀랐다. 연기도 물 흐르듯 하며 어느 지점을 정확히 찍어주더라. 20년 만에 뒷북을 쳤다.(웃음)
-완벽주의의 성향이 있는 모양이다.
▶완벽주의자는 아니다. 그냥 최선을 다하고 싶다. 내게 주어진 일에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는 게 제 일이다. 능력치만큼 못 나왔을 땐 어쩔 수 없다. (감독님이 '외국어 천재'라고 하는데) 쉽게 하는 줄 아시는 모양이다. (웃음)

-소녀들이 가득한 촬영장의 맏언니 뻘이었다.
▶늘 선배와 하다 제가 선배가 되니 부쩍 어른이 된 느낌이다. 그 아이들 보면 귀여운 마음이 들었다. 연기적으로는 소통하거나 하는 게 아니어서 촬영 때는 외로웠던 것 같다. 섬 같았다. 캐릭터 자체도 그렇고 위치도 그렇고. (박)보영이가 있어서 좋았다. 요즘 친구 같지 않게 진득하다. 뚝심이 있는 좋은 사람이다. 게다가 너무 예쁘더라.
-마지막 대목은 꽤 편집이 됐다. 아쉬움이 있을 텐데.
▶개인적으로 아쉽지만 이렇게 완성된 영화를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저는 많은 걸 조합할 수 있게 소스를 제공하는 것이 제 역할이라 생각한다. 또 영화는 만들어졌을 때 생명력을 가지니까 이젠 그 자체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저희들끼리는 '영화에 자막을 쓸 수도 없고' 이런 이야기를 한다. '저 신을 찍을 땐 40시간을 못 잤고, 중요한 신인데 시간을 안 줬고, 한 테이크 밖에 안 찍었고, 더 많은데 잘렸다고 자막 쓰고 싶어!'(웃음)
-결혼하니 변화가 생기나. 좀 전에 영화를 건축설계에 비유하는 모습이 남달라 보이긴 했다. (엄지원은 지난해 건축가 오영욱과 결혼했다)
▶건축과 영화가 비슷한 지점이 있다고 하더라. 인테리어는 드라마고 건축 설계는 영화 같다고도 하고. 항상 제가 몸담고 있던 쪽 사람들과 있다가 감성과 이성 둘을 다 써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과 만나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친구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남자친구가 집에 놀러 와서 안 가는 것 같아.'(웃음) 아이가 있는 게 아니라 지금은 연애할 때와 비슷하다. 거기에다 밥도 하고 청소도 해야 하는 느낌이랄까. 심정적으로 많이 편안해졌다. 인간이 늘 혼자고 고독하지 않나. 가족이 있어도 늘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내 편이 함께 있다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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