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하영(33·안하영)이 자랑한 증조부 안상호가 이완용과 함께 매국노 단체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밝혀진 가운데, 하영 부친의 과거 인터뷰가 재조명되고 있다.
앞서 2002년 중앙일보는 '손가락 장애 딸 꿋꿋이 키운 손가락 전문의(醫) 안병문 그의 이름은 애(아)비'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는 하영 부친이자 정형외과 전문의 안병문 원장이 "지난달 CD 출반 기념독주회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딸에게 '애비의 마음'을 띄운다"라며 큰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었다. 하영과 10살 터울의 큰딸은 선천성 단지(短指)를 극복하고 피아니스트로 성장했다고 소개됐다.
하영 부친은 "항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딸아. 아무리 진달래·개나리꽃이 흐드러져도 애비에겐 지난달 12일 저녁 서울 앰배서더 호텔에서 있었던 너의 CD 출반 기념회 때의 감격뿐이란다. 그날 그 자리엔 100여 명의 하객들이 자리를 함께 해주셨었지. 그분들은 네가 피아노로 베토벤과 쇼팽을 연주할 때까지만 해도 사실 그날 행사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단다. 그저 '돈 많은 병원장이 딸에게 피아노나 시켜 또 잘난 척한다'고 생각했다는구나. 하지만 손가락이 없는 왼손으로 피아노를 치는 너의 모습이 담긴 영상과 함께 너의 엄마가 인사 겸 설명을 곁들이자 얼마나 놀라는 모습들이던지. 나도, 엄마도 그동안 온갖 편견을 잘 참고 이겨내는 네가 늘 대견하고 자랑스러웠지만 막상 여럿이 지켜보는 데서 공증(公證)을 받는다 싶은 생각에 그만 목이 울컥하더구나. 그날 네 동생의 바이올린 축하 연주도 일품이었지. 딸아, 지금도 그 때의 장면이 눈에 선하게 밟히는 것을 어쩔 수가 없구나"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하영 부친은 "따지고 보면 지금 내가 너에게 이런 얘기를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것도 세월이 우리 편에 서서 고맙게 흘렀기 때문이란다. 사실 몸이 성치 못한 너를 낳고 너의 엄마와 함께 얼마나 속상해했는지.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너에게 얼굴을 들지 못하겠구나"라고 말했다.
특히 하영 부친은 "이왕 내친김에 지나온 세월에 대해 얘기해 보자꾸나. 너도 어렴풋이나마 알겠지만 우리 집안은 몇 안 되는 의료명문이지. 상(商) 자 호(浩) 자를 쓰시는 너의 증조부께선 종두(種痘)실시로 유명한 지석영(池錫永)선생과 함께 서울대 의대의 전신인 관립의 학교 교관으로 계시면서 초대 한성의사회장(지금의 의협회장)을 지내셨고, 조부(安富浩·1922~79)께서도 성심병원장을 지내셨거든. 그 덕에 애비는 고교와 대학을 세칭 명문이란 데를 거쳐 가업을 잇게 되었지"라고 자랑해 경악하게 만들었다.
이어 "1976년 대학을 마친 뒤 할아버지가 계시던 병원에서 수련의를 거쳐 서른한 살에 수련부장을 할 정도로 잘 나갔단다. 너의 엄마도 바로 거기서 처음 만났단다. 부산에서 간호대를 나와 그 병원에 취업 중이었어. 엄마는 얼마 안 있어 미술을 공부하겠다며 노르웨이로 유학을 떠났다가 핸디캡 디자인 석사과정을 마치고 5년 만에 귀국했단다. 우리가 82년 말에 결혼을 했으니 7년 만에 사랑의 열매를 맺은 셈이지"라고 덧붙엿다.
하영 부친이 '의료명문 집안'이라고 언급하고, 하영이 지상파 예능에서 자랑했던 증조부 안상호는 1916년 11월 대정친목회 결성 당시 평의원으로 참여한 기록이 있다. 이 대정친목회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영기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총재가 회장을 맡아 설립한 실업인 단체다. 이완용과 조중응, 송병준, 이윤용 등 당대 친일반민족행위자 상당수가 회원으로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안상호는 이완용을 살린 의사 중 한 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국사관논총 제32집 수록 논문에 따르면, 이완용은 1909년 12월 22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에게 단도로 어깨와 복부를 찔리는 피습을 당했다.
하지만 이완용 암살은 미수에 그쳤다. 이완용이 세 번이나 찔리고 살아난 데는 우리나라 최초 흉부외과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의료진 중에 안상호의 이름이 포함된 것. 자료에는 안상호를 비롯해 한성병원의 학전 의사, 안동병원장, 대한병원의 국지 원장과 고계 부원장, 전의 박종환 등이 치료에 참여해 이완용의 목숨을 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 암살 시도로 체포된 이재명 의사는 사형선고를 받고 이듬해 9월 30일 순국하였다.
더불어 안상호는 고종황제 독살 의혹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안상호는 1918년 12월 10일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일선동화의 가정'(一鮮同化의 가정), 즉 '일본인처럼 생활하고 동화되는 것이 모범적이다'라는 사례로 기사에 실리기도 했다.
일본인 아내와 결혼해 가정을 꾸린 안상호는 "나도 지금 조선 옷은 한 번도 입지 아니하고 음식도 매운 것은 조금도 못 먹는다", "자녀들이 집에서 일본어만 사용한다. 조선말은 전혀 하지 못한다. 완전한 일본인 가정으로 키우고 있다. 집안에선 전적으로 일본어만 사용하며 조선 사람과는 교류하지 않는다"라고 '일본인화' 된 점을 자랑스럽게 늘어놨다. 내선일체는 일제강점기 친일파들이 매국 행위를 정당화환 핵심 친일 논리이다.
뿐만 아니라 하영 조부는 한센인에 대한 인권유린이 벌어졌던 국립소록도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한 사실도 드러났다. 하영 측은 "하영 아버지 안병문 원장이 조부의 소록도병원 재직 시절 그곳에서 태어난 것으로 확인됐다"라고 말했다.
한편 하영 소속사 비스터스엔터테인먼트는 11일 "증조부 안상호 선생이 1916년 대정친목회의 평의원 명단에 이름이 올라있는 기록이 실제로 존재함을 확인했다"라고 매국노 행적을 인정했다.
<저작권자 ©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