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거탑'이 화제의 중심에 선 이유

이규창 기자 / 입력 : 2007.01.15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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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주말미니시리즈 '하얀거탑'(극본 이기원ㆍ연출 안판석)이 방송계에서 화제의 중심에 섰다. 시청률만 놓고 보면 전국 시청률이 14.7%(14일. TNS)에 불과하지만 시청률 40%대의 '주몽'이나 이보다 시청률이 높은 타 드라마에 못지않은 화제가 되고 있다.

△ '완성도' 찬반 팽팽.. 해외 시리즈물 팬들도 관심


전문 메디컬 드라마를 표방한 '하얀거탑'은 시작 전부터 많은 관심을 모았다. 'CSI' 'ER' 등 해외 시리즈물에 익숙한 20~30대 젊은 시청자들은 물론 오직 '연애질'에만 몰두하는 기존 한국의 미니시리즈에 식상해있던 시청자들에게도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지난 6일 첫 방송 이후 인터넷에서는 '하얀거탑'에 대한 찬반 논란이 뜨겁게 진행됐다. 오랜만에 보는 굵은 선의 전문직 드라마라는 찬사와 함께 해외 시리즈물 못지않을 거라는 기대를 했는데 실망했다는 반응도 있었다. 또한 의사라는 직업을 다룬 '메디컬 드라마'라기 보다 권력 투쟁에 집중하는 '기업 극화'에 가깝다는 지적도 있다.

이 처럼 '하얀거탑'이 논란을 일으키는 것은 그만큼 완성도가 높고 개성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우선 수술장면은 긴박한 분위기와 사람의 내부 장기를 그대로 재현한 특수효과가 어우러져 기존 한국의 메디컬 드라마보다 한 발 앞서 있다.


그러나 'CSI' 등 해외 시리즈물의 화려한 CG(컴퓨터 그래픽)에 익숙한 팬들에게는 뭔가 부족해 보이고, 기존 한국 드라마와 해외 시리즈물의 중간쯤 되는 '하얀거탑'의 비주얼이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반면 10% 초반대의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에서 그토록 뜨겁게 논쟁이 불붙은 것은, 해외 시리즈물의 팬들을 비롯해 인터넷에 익숙한 20~30대 시청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서울 신촌의 한 PC방에서 커플석에 앉은 3쌍의 남녀를 지켜봤다. 한 커플은 남녀가 컴퓨터 한 대에 MBC '무한도전'의 VOD 다시보기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었고, 또 다른 두 커플은 여성이 '무한도전'을 남성이 '하얀거탑'을 각각 시청하고 있었다. 각자 '무한도전'과 '하얀거탑'을 시청하던 두 커플은 인터넷 파일공유 사이트에서 불법 동영상을 다운받아 보고 있었다.

'동영상을 다운받는 방법'을 알아보려는 듯 접근해 불법 동영상을 이용하는 이유를 묻자 "토요일은 약속이 많아 방송 시간에 챙겨 볼 수가 없다. 또 VOD 서비스가 유료라는 점도 부담이지만, (불법 동영상)파일을 USB메모리에 저장해두면 언제든 원할 때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들 3쌍 중 한 커플은 각자 '무한도전'과 '하얀거탑'의 홈페이지에 접속하고 있는 상태였다. 드라마를 보다 뭔가 떠오르는 생각을 즉석에서 시청자 게시판에 풀어놓기도 하고, 현장 사진이나 다음주 예고 등을 챙겨보기도 했다.

이처럼 인터넷 사용에 익숙하고 의견 개진이 활발한 젊은 시청자들은 비록 시청률로는 그 존재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드라마 홈페이지 게시판 등에서 그 존재감이 여실히 드러난다. 20대 여성들을 열광시켰던 '환상의 커플'과 같이 '하얀거탑' 역시 폐인문화를 양산하고 이는 결국 드라마의 시청률에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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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형 전문직 드라마의 모델

'하얀거탑'의 또 다른 논란은 소위 본격 메디컬 드라마이냐, 아니면 종합병원을 배경으로 한 기업 드라마이냐 하는 것이다. 천재 외과의사답게 장준혁(김명민 분)은 첫 회부터 화려한 실력을 뽐내는 수술을 선보였지만, 드라마 초반의 주된 내용은 병원 내에서의 권력 다툼이다.

이 때문에 "의학 드라마가 아니라 병원을 배경으로 권력투쟁을 그린 기업 극화에 가깝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원작을 옮겨왔다고는 해도, 이만큼 한국의 현실에 적합한 전문직 드라마는 보기 어려웠다.

그동안 한국에서 전문직 드라마를 흉내낸 작품들을 보면 주인공은 실력도 있고 착하며, 그의 경쟁자는 실력도 부족한 데다 악하다. 경쟁자가 온갖 모략과 음모 그리고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지만 결말은 주인공의 승리로 끝나며 "착한 자는 복을 받는다"는 교훈을 남긴다.

반면 '하얀거탑'은 직업 혹은 직장에서의 성공과 선악을 무리하게 연결짓지 않는다. 또한 실력과 착한 마음만 있으면 성공한다는 '아름답지만 비현실적인' 직장 따위는 없다. 일반인들은 병을 치료해주는 곳으로만 알고있는 병원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과 이권 등은 직업 세계 어느 곳도 '한국 직장의 현실'에서 예외가 없다는 걸 보여준다.

뛰어난 실력을 갖췄지만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매끄럽지 못한 의사 장준혁이 견제를 받으며 출세에 제동이 걸리는 것은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도 얼마나 흔한 일인가. 또한 묵묵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실력있는 의사 최도영(이선균 분) 역시 직장 내에서 주목을 받지 못한다. 이 역시 묵묵히 열심히 일해도 연봉협상에는 아무런 반영이 없는 한국의 직장 현실과 다르지 않다. 특히 남자들의 직장 내 권력관계와 그대로 이어지는 부인들의 사교관계 역시 얼마나 한국적인가.

'줄'을 잡고 '빽'을 동원하고 적당히 타협을 하고 경쟁자는 제거하면서 '실력'을 인정받고 출세하는 것이 어느 조직에서나 볼 수 있는 권력의 속성이다. 장준혁과 최도영은 어쩌면 당연히 대접받고 출세해야 마땅한 실력자임에도 그리 순탄치 않은 과정을 겪는다. 'CSI'처럼 일만 열심히 하기에는 현실이 녹녹치 않으니, 한국형 전문직 드라마 '하얀거탑'은 훨씬 고난도의 직업 세계를 다루는 셈이다.

'대장금'과 '상도'가 사극의 틀 안에 전문직 드라마의 내용을 담았다면, '하얀거탑'은 일본 원작을 가져왔지만 한국의 조직과 기업문화를 잘 반영한 새로운 형태의 전문직 드라마를 제시하고 있다. 악역인 부원장 우용길(김창완 분)이 주인공보다 더욱 화제가 되는 것도 '리얼리티' 때문이다.

오늘도 '줄서기'와 '관계'를 강요받는 한국의 직장인들에게 '하얀거탑'은 우리의 자화상을 통해 새로운 종류의 카타르시스를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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