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남녀 로맨스에 묻힌 징병·원폭 아픔

신희은 기자 / 입력 : 2009.09.07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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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침묵의 소리' 남자 주인공 조선청년 동진과 일본여성 미와.


2004년 3월28일 일본 아사히신문에 가네바라 햐쿠쇼쿠의 사망이 보도됐다. 햐쿠쇼쿠의 본명은 김백식. 그는 1944년 태평양 전쟁에 강제 징병된 후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이역만리 폐쇄병동에서 삶을 마감한 조선인이었다. 현금 4만엔(약50만원)과 '조선적'이라고 적힌 외국인 등록증이 고 김백식 씨가 남긴 전부다.

애달픈 생을 마감한 그의 사연이 무대에 올랐다. 아시아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 불리는 뮤지컬 '침묵의 소리'가 5일 세종문화회관 세종M씨어터에서 첫 막을 올렸다.


고 김백석 씨는 '침묵의 소리'에서 가야금 연주와 풀잎피리 소리를 좋아했던 조선청년 '김동진'으로 다시 태어났다. 험한 세상에 공부만이 살 길이라는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에 일본 유학길에 오른 동진은 일본 여성 '미와'와 사랑을 빠진다.

동진은 태평양 전쟁에 학도병으로 끌려가 가까스로 살아 돌아오지만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사랑하는 미와를 잃는다. 충격으로 55년 간 정신병동에 갇혀 지낸 동진의 삶이 한 간호사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다는 이야기다.

◇ '한일합작, 테라피 뮤지컬' 화려한 타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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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제공 : 서울시뮤지컬단.


뮤지컬 '침묵의 소리'는 제작발표회 당시 이례적인 타이틀로 화제가 됐다. '한일합작 예술공연'과 '테라피 뮤지컬'이 그것이다.

'침묵의 소리'는 서울시 뮤지컬단과 일본 도쿄의 긴가도 극단이 공동 제작했다. 유희성 뮤지컬단장과 요시마사 시나가와 극단 대표가 직접 연출을 맡았고 정신병동 간호사, 일본 여성 '미와', 일본군 장교 등 배역은 일본 배우를 동시 캐스팅해 리얼리티를 살렸다. 일본인 역은 일본어로, 한국인 역은 한국어로 연기하고 자막을 활용해 양국 관객 모두가 관람할 수 있게 배려했다.

뮤지컬의 새로운 장르적 시도라는 '테라피' 기능도 살리고자 애썼다. 유희성 단장은 "작품에 간호사가 테라피스트로 등장해 동진의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역할을 한다"며 "전쟁의 아픔을 느끼며 관객들도 치유에 공감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 다소 진부한 스토리텔링은 관객 몰입에 약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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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침묵의 소리'에 조선청년 동진을 사랑하는 일본인 미와로 출연한 일본 배우 '하츠네 마요'.


첫날 작품을 관람한 관객의 반응은 엇갈렸다. "실감나는 전쟁 묘사와 폭발적인 가창력이 인상적"이라는 의견과 "조선청년 김동진과 일본여성 미와의 사랑에 쉽게 공감하기 어려웠다"는 견해가 뒤섞였다.

작품규모와 일본인까지 동원한 출연진, 배우 가창력 등 화려한 외연을 장점으로 뽑았지만 극을 이끌어가는 주인공들의 사연, 즉 스토리텔링의 힘은 아쉬웠다는 평이다.

조선인 동진과 일본인 미와는 극 시작부터 특별한 동기 없이 사랑에 빠진 연인으로 등장한다. 일본군으로 참전한 동진에게서는 조선인으로서 겪는 고민, 일본인 연인과 평범하게 살고 싶은 소망 사이의 갈등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국경을 넘어 평범한 사랑을 꿈꾼 연인'의 사랑을 강조하다보니 전쟁 피해자인 동진과 원자폭탄 희생자인 미와의 굴곡진 인생이 다소 묻혔다. 주인공 외에 일본군 장교, 병동 간호사, 동진 어머니, 미와의 오빠 등 개성 있는 배역의 사연을 좀 더 부각됐다면 관객의 감정몰입이 수월했을 것이라는 평도 있었다.

뮤지컬 '침묵의 소리'는 세종M씨어터에서 20일까지 공연된다. 다음달 11일~28일까지는 일본 4개 도시 순회공연을 선보이며 2010년에는 중국으로도 진출할 예정이다.

정치적인 색채를 배제하고 한·일 양국인의 애절한 사랑을 그린 이번 공연이 양국 간 쌓인 세월의 응어리를 치유하는 약이 될지 판단은 관객 몫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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