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2TV 드라마 ‘애정의 조건’은 진부하다. 하지만 지난주 전체 시청률 33.5%(A.C. 닐슨 집계)를 기록하는 등 주말극 시청률 수위를 달리고 있다.
같은 시간대 경쟁사인 MBC가 이 작품의 히로인 채시라에 맞서 드라마 ‘장미의 전쟁’에서는 최진실이라는 빅 카드를 내밀었다가 실패하고 서둘러 접은 뒤 드라마 ‘사랑을 할 거야’에서는 장나라라는 뉴 카드로 전략을 바꾸기도 했지만 별다른 재미를 못 보고 있다.
진부함은 우리 삶을 전복시키기보다 지탱시켜 주는 요소이다. 위기를 겪을 때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변혁’보다는 ‘안전’에 기대게 마련이다. TV 시청자들은 기존의 구태 의연한 삶의 패턴을 답습하는 안온함을 기꺼이 선호한다. 그리고 '오늘의 고난 원인은 어제의 잘못'이라는 '사필귀정'의 원리를 들이대며 현재의 고통 받는 '나'와 'TV 속 인물'을 당연시 하려는 경향이 있다.
‘애정의…’에서 ‘은파’(한가인)로 대변되는 여자의 떳떳치 못한 과거는 여전히 ‘죽을 죄’다. “여자는 과거를 숨기고 남자는 용서할 수 없으며 남자는 가재도구를 부수고 여자는 울면서 매달리고 남자는 떠난다”는 70~80년대 통용되던 스토리가 서기 2004년 9월 5일 프라임 타임대 안방에서 버젓이 전파를 타며 눈코뜰 새 없이 바쁜 맞벌이 부모 가정들에게 다시 한번 ‘순결’ 교육의 멍석을 깔아주고 있다.
또 욕하고 싶지만 적당한 대상을 찾아내지 못해 억눌리고 찌들린 일반인들에게 안방이라는 사적인 공간에서 불륜의 당사자를 맘껏 비난하게 하는 묘미도 이 드라마는 제공한다.
한편 이 작품은 고정 관념에 충실한 드라마다. 남편 '정한'(이종원)의 외도는 용인되지만 부인 '금파'(채시라)의 외도는 ‘경칠 감’이라는 이율 배반의 논리가 전개된다. 그리고 여전히 ‘여자의 적은 여자’요, 지혜로운 판단은 남자들이 내린다.
며느리 금파의 부정을 아들 정한은 용인해도 시어머니(반효정)는 절대 봐줄 수 없고, 갓 시집 온 며느리를 못살게 구는 것은 시누이 애리(조여정)다. 또 외도한 부친 '한걸'(한진희)은 속깊고 현명하며 그 외도로 낳은 자식을 키워낸 모친 '기자'(오미연)는 독하고 상스럽다.
5일 방영분에서 그 이전까지 은파를 끊임없이 괴롭히며 이 작품의 갈등의 핵이었던 애리가 갑자기 착해져 외국으로 떠나는 모습에서 의아해 하던 시청자들이 많을 것이다. 애리 역의 조여정과 윤택 역의 지성은 개인 스케줄 상 연장된 방송분을 채울 수 없어 이 작품에서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드라마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고 후속 작품 준비가 늦어지고 있어 방송사로서는 서둘러 접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성격 변화에 납득할 만한 시간은 당연히 주었어야 하는 게 마땅하다.
‘애정의 …’은 로맨틱 코미디 일색으로 경도된 최근 우리 브라운관에서 생의 진정성을 거론하는 드문 드라마이긴 하다. 연기파 채시라의 신들린 연기력, 신예 한가인의 빼어난 눈물연기, 감성파 지성의 섬세함을 받쳐 주는 탄탄한 중견 연기자들 또한 ‘애정의…’의 인기의 조건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70~80년대를 겪으며 우리 모두가 뼈저리게 절감한 것은 ‘물러서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는 것’. 70~80년대 줄거리로 날이 갈수록 연장되며 주말마다 막이 오르는 이 작품을 통해 노회한 정권의 장기집권을 지켜보고 있는 듯하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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