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살자(들)', 역사왜곡 논란으로 집중 포화

#1. 2000년 12월의 어느 날, 중국 베이징에서 무려 400여km 거리가 떨어져 버스로 6시간을 내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씽청. 해안을 마주한 이곳의 벼랑 끝에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한 옛 토성이 아슬하게 서 있었다. 김성수 감독의 연출작 ‘무사’의 촬영현장. 명나라에 사신으로 떠난 고려인들이 간첩으로 몰린 뒤 겪는 험난한 여정을 그린 영화의 주연 안성기를 비롯해 정우성, 주진모, 당시 중국의 신예로 떠오른 장쯔이 등 스타급 배우들이 토성 앞에 펼쳐진 황량한 벌판 위에 섰다. 그들 사이에 몇몇 낯선 얼굴도 있었다.
이들은 하루 촬영을 마친 뒤 숙소에서 기자들을 만났다. 기자들의 질문은 안성기, 정우성, 주진모, 장쯔이 등 스타급 배우들에게만 향했다. 낯선 얼굴은 그러려니 무던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아무런 서운함의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뒤 1년여 뒤 낯선 얼굴은 다른 조연급 배우들과 함께 인터뷰에 나섰다. 코미디 영화에 출연한 그는 요즘 표현으로 ‘신 스틸러’라 불릴 만했다. 동료 조연 배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코미디 영화 출연자들의 인터뷰였던 때문인지 자리는 경쾌했다. 간간이 웃음이 넘쳐났다. 하지만 배우는 묵묵히 자신의 할 말만 내놓을 뿐이었다. 인터뷰 자리를 함께 찾은 영화 제작자는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라며 촬영현장에서 캐릭터에 몰두하며 코믹 연기를 능수능란하게 펼쳐내는 모습을 두고 “타고 났다”고 말했다.
#2. 충북 청주시 청원군에서 나고 자랐다.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1980년대 후반 지역 극단인 청년극장의 무대에 처음 섰다.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그곳에서 연기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30여년 만인 지난 2024년 가을 다시 청년극장을 찾아 이 극단의 작품에 출연했다. 당시 창단 40주년을 맞은 청년극장은 이를 기념하면서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 '열개의 인디언 인형'을 공연했고, 배우는 자청해 무대에 올라 후배들과 함께 연기를 펼쳤다.
극단 그리고 후배들과 맺은 인연은 올해 1690만여 관객을 모은 주연작 ‘왕과 사는 남자’로도 이어졌다. 배우가 30년에 걸쳐 의리를 지킨 ‘열개의 인디언 인형’을 본 ‘왕과 사는 남자’의 연출자 장항준 감독이 극단 단원들을 자신의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시켰다. 그 가운데 ‘왕과 사는 남자’의 주인공 엄흥도의 실제 후손인 배우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같은 과정은 더욱 화제가 됐다.
#3. 최근 MBC 라디오 ‘손석희의 12시’ 진행자인 방송인 손석희는 달리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배우를 떠올렸다. 배우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의 길을 거의 매일 아침 달린다고 했다. 여행을 가서도 마찬가지란다. 하지만 매번 각기 다른 길을 뛰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달린다고 했다. 그의 달리기 안에서 같은 길은 없는 모양이다.
배우는 자신이 오전 달린 길을 오후에 다시 한번 되돌아 걷는다고 손석희는 전했다. 아침 시간 달릴 때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오후에 쉬엄쉬엄 걸으며 “뛰면서 잊은 것들”을 세세히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손석희는 “배우로서 참 좋은 자세”일 것이라며 “사고의 깊이를 깊게 하고 넓게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제 배우가 누구인지 그 얼굴을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다. 유해진. 1990년대 후반 TV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얼굴을 대중에 내비친 뒤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가 풍파 많은 세상에 단 한 번의 추문에도 휘말리지 않고 그저 배우로서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음을 부인할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그건 연기와 자신이 표현해내는 캐릭터와 이야기에 대한 애정 이전에 한 사람의 직업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충실함의 방편이기도 할 것이다. 세상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따라서 한 사람의 직업인으로서 그의 일터인 촬영현장과 무대를 폄훼하고 모욕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심지어 그가 스크린에 펼쳐낸 세상과 이를 살아가는 또 다른 인물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쏟아내는 폄훼와 모욕의 실체는 무엇일까.
지난 5일. 일부 유튜버들이 자신들이 속한 단체의 이름을 내세워 유해진의 자택 앞에 몰려들었다. 이들은 현재 상영 중인 영화 ‘암살자(들)’을 규탄하며 주연 배우인 그를 향해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모욕과 협박성 발언이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암살자(들)’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새삼 거론하는 것은 더 이상 부질없다. 다만 영화를 제대로 본 관객이라면 현재 일각에서 공격의 화살을 겨냥하고 있는 ‘음모론’과 ‘배후설’의 확증, 이를 넘어 역사적 사실 여부를 단정하는 시선에까지 이르렀느냐고 묻고 싶다. 영화는 극 중 사건이 남긴 몇몇 의문점들의 빈틈을 상상과 창작의 이야기로 메워보려는 제작진의 노력일 뿐이며, 배우는 이를 자신에게 주어진 캐릭터로서 풀어나갔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를 향한 폄훼와 모욕적 공격은 그의 얼굴을 두고 ‘북한상’이라고 가리키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당하게도.
“영화는 보지 않았다. SNS를 통해 스토리 전개 과정을 보고 있다.” “(영화를)볼 일 없다. 대충 시나리오를 봤다. 푯값 내주기가 싫어서.”
유해진의 자택 앞으로 몰려간 이들이 MBC ‘뉴스데스크’ 취재진에 내놓은 말이다. 폄훼와 모욕적 공격은 이제 혐오로 치달아가고 있다.
윤지훈(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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