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이스는 오해의 악기다. 저음이라는 태생적 특징 때문에 소리가 잘 안 들리고, 줄 수도 기타보다 두 줄이 적다는 이유로 베이스는 연주자와 리스너들로부터 똑같이 무시되곤 했다. 적어도 밴드 음악이 주류였던 시절엔 그랬다. 그땐 멤버를 구해도 베이시스트는 귀했다. 아마도 팀 내 존재감이 미미하다는 이유로 포지션을 꺼렸던 것이리라. 물론 베이스라는 악기에 대한 저 모든 상식은 오해요 편견이다. 잘 안 들리는 건 멜로디와 리듬을 이어주는, 악기 자체가 짊어진 겸양의 위치 때문이며 재즈 기타리스트 리 릿나워의 ‘Rio Funk’에서 마커스 밀러의 슬래핑이나 베이스를 전면에 내세운 레드 핫 칠리 페퍼스, 프라이머스 같은 밴드들의 음악이 가르쳐주듯 현(弦)의 수라는 것도 아무 덧없는 평가 기준일 뿐이다.
여기까진 밴드 음악의 예였다. 베이스가 케이팝에 내려앉는 순간 그것은 모든 소스 위에 군림한다. 스포트라이트는 어느새 이 악기를 향하고 멤버들의 춤 동선, 곡의 생명줄을 거머쥔 드롭(Drop) 파트 등은 거의가 베이스의 자장 아래 머문다. 에스파의 ‘Whiplash’ 도입부가 그토록 강렬했던 이유만 떠올려봐도 베이스 효과가 지닌 저력은 금세 설명된다. 레드벨벳의 ‘Day 1’, 뉴진스의 ‘Bubble Gum’, 세븐틴의 ‘HEY BUDDY’에서 베이스의 역할은 또 어떤가. BTS의 ‘Dynamite’가 빌보드 정상에 설 수 있었던 데도 케이팝의 핵심인 노래와 춤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는 베이스의 역할이 컸다. 요컨대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에 가장 가까운 베이스는 케이팝의 심장인 비트의 맹아이다. 나는 이 베이스를 가장 맛깔나게 활용하는 케이팝 그룹으로 아일릿을 꼽고 싶다.

거두절미하고 내가 아일릿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는 베이스 때문이다. 'Cherish (My Love)'가 대표하듯 멜로디가 지닌 레트로 성향, 글로벌 시대에도 케이의 언어(한글)를 노랫말로 고수하는 면을 향한 편애는 개인 취향일 뿐이다. 당장 떠오르는 곡들만 적어 봐도 그렇다. ‘Magnetic’, ‘It’s Me’, ‘밤소풍’, ‘oops!’, ‘빌려온 고양이 (Do the Dance)’, ‘Tick-Tack’, ‘Lucky Girl Syndrome’, ‘Pimple’까지, 베이스가 소극적인 노래는 하나도 없다. ‘밤소풍’과 ‘Pimple’ 정도가 비교적 은근할까, 언급한 모든 노래가 베이스(Bass)를 베이스(Base)로 삼는다는 본질에선 같다. 특히 ‘Tick-Tack’ 같은 곡의 베이스 라인은 다른 모든 요소를 빼고 그것만 감상해도 재미있을 지경이다. 라이즈는 특정 곡(‘Boom Boom Bass’)으로 베이스를 강조했지만, 아일릿은 베이스를 자신들 음악의 정체성으로 삼는다. 아일릿의 음악에서 베이스는 서론이기보단 본론이었고, 공기요 태양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새 EP ‘BREAK EVEN’에서도 아일릿표 베이스를 들려주겠거니 싶었지만 내용물은 예상과 달랐다. 별로라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기존과는 다르다는 얘기다. 이번엔 베이스의 중후한 밀도감보단 테크노와 하우스의 전자(electronic) 질감을 먹여 더 반짝반짝해졌달까. 베이스와 성은 같지만 이름은 다른 베이스 드럼이 더 강조되고 있는 셈이다. 제목부터 청량감 넘치는 ‘Pop’ 같은 트랙에선 브라질리언 펑크도 들린다. 그렇게 네 트랙으로 무장한 신작의 타이틀 곡은 ‘체포하겠어’다. 첫인상이 범상치 않은 이 곡에 관해 해외에선 “노래라기보단 밈처럼 보인다”는 평가가 들린다. 'It's Me'를 좌우로 두세 번 비튼 것 같은 이 과감한 노벨티 테크노 스타일은 기존 오렌지캬라멜의 기상천외함과도 비교되었다. 실제 ‘체포하겠어’는 4년 전 프로듀서 250이 시도한 ‘뽕’의 영역에 다가가 있는데, 환청이 아니라면 도입부에 심어놓은 짧은 보컬 추임새는 분명 250이 연구한 이박사의 그것이다. 여기에 간주를 지배하는 호루라기의 불협화음과 ‘최 진사댁 셋째 딸’의 보컬 멜로디를 변주한 버스(verse)까지 더한 아일릿은, 상대의 습관성 친절을 범죄로 간주하고 앙증맞은 수갑을 꺼낸다.

좋았다. 처음엔 ‘이게 뭐지?’ 싶을 수 있으나 다른 괜찮은 곡들이 그렇듯 ‘체포하겠어’는 들을수록 괜찮은 곡이다. 재밌는 건 저 노래를 둘러싼 EP의 모든 곡이 하나의 서사로 완결 된다는 것. 즉 ‘Super in Love’에서 혼자만의 썸을 얘기한 뒤 그 썸이 일방적인 감정이었다는 것에 짜증이 나다가(‘More’), ‘체포하겠어’에 이르러 상대를 떠나는 스토리다. 귀여운 신스 플럭 멜로디가 시작부터 귀에 꽂히는 마지막 곡 ‘Pop’은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그를 떠나 새로운 짝을 만난다는 나름의 해피엔딩에 닿는다. 다프트 펑크의 ‘Da Funk’를 좋아하는 나에게 이번 앨범의 백미는 ‘More’였다. 그 녀석의 무관심에 혼돈과 짜증이 밀려오는 'More' 속 상황은 마치 ‘Da Funk’의 그루브를 2배속으로 확장한 듯한 느낌을 주며 듣는 사람을 무아지경으로 몰아간다. 따로 추천하고 싶은 곡이다.
아일릿의 새 앨범 제목은 천만 영화를 헤아릴 때 자주 듣는 경제학 용어다. 다만 그 뜻이 손실도 이익도 없는 ‘관계의’ 결과라는 데서 본래 의미와 차이를 둔다. 동어반복이긴 하지만 손익분기점(BREAK EVEN)을 내건 아일릿의 신작은 이미 손익분기점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이야기 속 둔한 그를 넘어 윤아, 민주, 원희, 이로하는 자신들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까지 “체포”했다.
김성대(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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