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싸움도 이런 막싸움이 없었다. 왕우 이소룡 성룡 이연걸 토니자 등이 펼친 제대로 된 무예는 진정 남의 얘기였다. 무기? '007 스카이폴'에 등장한 손금인식 첨단 권총은커녕 '올드보이'에서 좁은 복도를 핏빛으로 물들게 한 장도리조차 없었다. 가진 건 내 몸뚱아리밖에 없었다.
지난 8일 개봉한 정병길 감독의 '내가 살인범이다'는 '말죽거리 잔혹사' '품행제로' '비열한 거리' '올드보이' '영화는 영화다' '추격자' '똥파리' '범죄와의 전쟁' '도둑들' 등 한국영화가 사랑해마지 않는 막싸움에 내린 '신의 한수'였다. 규칙도 합도 없고 오로지 "죽기 아니면 살기"밖에 없는 그 무지막지한 막싸움. 보고 있는 관객마저 뼈마디가 아프다. 역시 액션스쿨을 나와 '나는 액션배우다'를 연출한 감독답다.
영화가 시작되면 형사반장인 정재영이 야심한 밤 허름한 술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다. "소주 한 병 더!"를 외치는 찰나, 유리문 밖에서 하얀 마스크를 한 남자가 서늘하게 달려온다. 설마, 유리문 깨고 덮치는 건 아니겠지. 맞았다. 허름한 술집의 깨지기 쉬운 유리문이라는 걸 진작 알아챘어야 했다. 괴한은 냅다 정재영을 덮쳤다. 이어 3분여 동안 숨 막히게 진행된 질펀한 쌈박질. 수비고 뭐고 없다. 때리면 맞고, 휘두르다 맞히면 그만이다. 영화는 타이틀도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어진 원 신 원 테이크 추격신. 비 내리는 밤 좁은 골목, 남의 집 높은 담벼락, 물 흥건한 폐건물 어두운 내부를 두 남자가 쫓고 쫓기다 넘어지고 뒹군다. 관객은 서서히 알아챘다. 괴한은 연쇄살인범이고, 형사는 살인범과 사적으로 얽힌 피해자라는 걸. 하정우 vs 김윤석의 '추격자'에 대한 오마주? 틀렸다. 이는 영화 처음 나온 그 야생 수컷들의 막싸움에 대한 숨가쁜 2막이었다. 추격신도 이렇게 막싸움처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두 배우의 침 튀기는 열변이다.
한국영화는 좀체 정규 무예나 무술에 대해 호의적인 시선을 보이지 않았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태권도 사범이라며 온갖 폼 잡다 흠씬 두들겨 맞은 김서방 마동석을 떠올려보시라. 아니면 '주먹이 운다'라던가. 올림픽 복싱 은메달리스트 최민식과 소년원 출신 복서 류승범이 제대로 격식을 갖춰 붙은 '주먹이 운다'에서도 둘의 최종병기는 다름 아닌 막싸움이었다. '내가 살인범이다' 역시 형사반장 정재영이 경찰대 출신에 100미터를 12초에 끊는 준족이라는 정도만 알려줄 뿐 그가 익힌 여타 싸움의 기술은 언급조차 않는다.
총 역시 한국영화가 그닥 사랑한 무기는 아니었다. 총기소지를 금지하는 현행법 때문인지 한국영화는 경찰과 군인 말고는 총을 가까이할 수 없었다. '내가 살인범이다'에서 형사 정재영이 결국 끝까지 믿은 건 결코 총이 아니었다. 원거리 타격의 대명사 총을 버린 결과는? '올드보이'의 장도리, '마더'나 '빈집'의 골프채, '사마리아'의 빨간 벽돌, '범죄와의 전쟁'의 각목 등 주인공들이 닥치는 대로 손에 잡은 이 '연장'들은 지근거리 타격감을 꽤나 드높였다.
20세기 말 '고스트 바둑왕'이라는 일본만화가 있었다. 만화 초반 초등학생이었던 주인공 신도 히카루가 우연히 후지와라노 사이라는 영혼을 만나 '신의 한수'를 찾는다는 내용. 긴 생머리의 여자처럼 생긴 사이가 알고 보니 16세기 일본 바둑계를 평정한 혼인보 슈우사쿠의 육신에도 깃들었었다는 설정에 일본은 물론 한국의 바둑 팬들과 프로기사들도 열광했다. '내가 살인범이다'의 막싸움과 추격신은 대중적 실전 무예의 부재와 총기소재 불허라는 '초읽기'에 몰린 한국영화에 강림한, 준비된 감독의 '신의 한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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