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간중독'의 숙진 역 조여정 인터뷰

'인간중독'(감독 김대우)의 조여정(33)은 특별하다. 영화는 남몰래 베트남전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엘리트 군인 김진평(송승헌 분)과 부하의 아내이자 화교인 종가흔(임지연 분)의 지독한 사랑을 담는다. 조여정은 김진평의 아내 숙진 역을 맡았다. 헌신적인 내조의 여왕이자, 자기애로 똘똘 뭉친 대령 사모님인 숙진은 '인간중독'에 등장하는 캐릭터들 중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다. 손쓸 수 없는 관계에 빠진 남녀를 눈치 채지도 못한 채 적당히 지위를 누리고 권력을 휘두르며 남편을 서포트한다. 그 모든 게 진평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자기애의 발현이라는 게 아이러니지만, 그마저도 얼마나 현실적인가.
허리를 졸라맨 컬러풀한 복고 의상과 양 끝이 치켜 올라간 안경을 쓰고 자기애로 똘똘 뭉친 여인을 능청스럽게 그린 조여정는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얼굴을 지닌 배우인지를 입증한다. 경지에 오른 '밀당'으로 뭇 남성들을 홀린 '방자전'의 뮤즈가 남편만 바라보는 기혼녀가 되어 버림받은 건 짐짓 서글프지만, 조여정은 개의치 않고 보란 듯이 숙진을 소화했다. 그녀가 더 반짝이는 게 바로 그 이유다. '방자전'이란 센세이셔널한 승부수 이후, 그녀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한 번 더, 또 한 번 더 성장했다. 어쩌면 이미 훌쩍 커 있던 조여정을 우리가 뒤늦게 알아본 것인지 모른다.
-분량이 많지 않지만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잘 봤다.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더라.
▶잘 했다는 이야기를 오늘에야 듣는다. 시사회 때야 다들 관계자가 봤으니 그러려내 했다. 칭찬 많이 받으니 기분이 좋다.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였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의상이며 안경, 목소리 모두가 숙진 캐릭터와 맞아떨어졌다. 허리를 조이는 옷, 특히 뾰족한 안경.
▶목소리는 일상적 톤보다 낮다. 평소가 좀 낭랑한 편이라면 '인간중독'에서는 결혼한 40대 느낌으로, 내 남편 지위에 따라 나도 나이 많은 여자들을 아울러야 했다. 그래서 톤은 낮추고 말투는 아줌마 말투로 잡았다. 그게 억지스럽지 않아야 했다. 의상과 분장은 철저하게 제가 맞췄다. 옷 자체가 허리를 조이는 디자인인데 다행히 힘들지는 않았다. 돋보이게 덕을 봤다. 안경은 감독님이 쓰자고 하셨다. 너무 감사하다. 우리끼리는 '비즈니스'라고 하는데 제가 안경 덕에 할 수 있는 짓거리랄까, 디테일들이 생긴 거다. 정말 안경을 쓰면 '그 분'이 오신 것 같았다. 너무나 큰 도움이 됐다.

-'방자전'에서 남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춘향이였다가 이번에는 남편을 뺏기는 아내가 됐다. 분량도 적다.
▶저는 이렇게 생각한다. 저랑 작업을 한번 했던 감독이 다시 제의를 하신 거다. '내게 또 꺼낼 게 있다고 판단을 하셨구나' 했다. 첫 작품은 말 그대로 처음 만나 뭔가를 하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는 몇 달을 함께 작업하면서 실제 조여정을 알게 되신 분이 '이런 캐릭터도 나올 수 있겠구나' 하신 게 아닌가. 너무 고맙고 신났다. 그러니 제가 어떻게 주연 조연을 가리나. 또 운이 얼마나 좋나. 배우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작품을 통해 보일까' 하는 게 늘 화두다. 이런 기회가 자연스럽게 이 타이밍에 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좋았는지. 기혼자다 이런 설정은 전혀 꺼리지 않았다. 그런 건 중요하지도 않고 아직은 신경도 안 쓰인다. 다만 그것을 해 내고 싶었다.
-임지연이 맡은 종가흔은 무심하게 남자를 홀린다. 꼬리치는 것으로 보인다는 여성 관객의 평가도 많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는 그저 신비롭고 매혹적이어서 '누가 하게 될까' 진짜 궁금했다. 임지연이라는 배우가 나타났을 때 '아 이거야, 이 새로움. 매력있다'고 생각했다. 제가 본 '인간중독'의 가흔이는 '선수'라기보다 서툴러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워낙 많은 일을 겪은 여인인데 그래서 사랑을, 그 끌림을 만만하게 보지 않았나 한다. 끌리는 대로 했다가 훅 빠지고 난 뒤에는 오히려 미숙했다고 봤다. 이건 답이 없는데 그걸 몰랐던 거지. 진평도 속수무책이었다. 자기가 왜 그러는지 설명이 안 되니까. 그 자체가 '인간중독'이라는 영화인 거다. 제가 진평과 가흔을 너무 좋아하나보다. 숙진이를 연기한 사람이 할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면 본인이 했던 숙진은 어떤가.
▶숙진이 보통 여자는 아니었다. 분명 모든 일이 끝난 뒤에도 숙진은 잘 살았을 거다. 숙진이는 남편과 가흔의 관계가 만천하에 드러난 다음에 주저앉거나 화를 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다만 나를 망신시킨 김진평에게 실망을 했다. '내가 어떻게 노력했는데 나를 이렇게 무너뜨려' 하는 정서로 했다. 워낙 자기애로 똘똘 뭉친 여자였으니까. '나 이제 어떻게 해' 하는 연민은 아니었다.

-남편 부하의 아내인 전혜진에게 김치를 담가오라고 쏘아붙이는 신은 퍽 인상적이다.
▶신이 워낙 없으니까.(웃음) 만날 웃을 것 같은 여자가 보여준 다른 모습이니까 그랬을 거다. 저도 평소에 이야기하다가 소리는 안 높이고 정색할 때가 있다. 그런데 평생 그런 제 얼굴을 못 보고 살지 않나. 촬영 때 모니터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이런 얼굴로 이야기를 하는구나' 싶어서. 보면서도 신기하더라.
-초반에 등장하는 김진평과의 베드신에는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뒤에 등장하는 김진평-종가은의 센 베드신만큼 임팩트가 있다.
▶한 신으로 그 부부의 단면을 보여주는 거니까. 그런데 다들 그렇게 웃을 줄은 몰랐다. 현장 스태프가 웃는 거야 '우리 배우가 이렇게 하고 있네' 하니까 웃는 거지, 관객들은 아니지 않나. 웃기라고 한 건 아닌데 그런 반응이라 색달랐다. 물론 베드신 연기 자체도 색달랐다. 베드신이라고 해도 이 여자는 그저 아기를 갖고 싶어서 하는 것일 뿐 사랑이 아니니까. 그래서 숙진이는 그 순간에도 문제의 안경을 쓰고 있다. 어쨌든 저는 진지하게 했다.(웃음)
-'방자전'이 조여정 연기 인생의 분기점이 됐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사실 더 평가하고 싶은 건 그 이후의 행보다.
▶'방자전'은 배우 조여정의 커리어에서 터닝 포인트다. 그것도 완전한. 모든 걸 걸고 승부수를 던졌다. 그것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데 감사한다. 나 혼자 힘만이 아니었다는 걸 잘 안다. 다 걸었다는 걸 알아주신 것 같다. 오래 하면 언젠가 진심은 통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방자전'에 이어 '후궁', '인간중독'을 거치며 조여정이 한 계단 한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것 같다. 그 다음에 대한 부담은 없나.
▶잘 해내건 못 해내건 일단 해내면 어쨌든 성장을 한다. 겪어냈다는 것 자체가 성장이 아닌가. 한 걸음에 10cm씩 성장하는 게 아니다. 지금 저에 대한 평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1mm라도 자라면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해내고 싶은 걸 달성했다는 데 스스로 만족을 느낀다. 제 스펙트럼이 넓어지기를 김대우 감독님이 많이 바라셨다. 그러나 일이든 다른 것이든 실망시키면 안 되는데 하는 부담은 없다. 언제라도 내 연기가 심판대에 오를 수 있다. 제가 혹평을 받고 손가락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감수해야 한다. 그래야 현장을 즐길 수 있다. 다른 일에서도 그렇다. 내 인생이고 내 판단이니 나쁜 일 아니고 하고 싶다면 그냥 한다. 잘못됐다면 인정하고 또 사과한다. 단순하게 한다.

-차기작 '워킹걸'에서는 워커홀릭 여자라고. 혹시 연기하는 데 있어서도 워커홀릭 같은 면이 있나. 요즘 연기에 푹 빠진 게 보인다.
▶홀릭이라는 단어가 '인간중독'과도 이어진다. 나는 어딘가 '중독'된다는 걸 싫어한다. 살거나, 연애를 하거나 다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좋다. 중독되지 않고 즐겨버리면 된다. 어쩌면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지만 '홀릭'에서 나오는 힘과 즐기는 데서 나오는 힘은 다른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연기가 재밌는 걸 어떻게 감추나. 가흔이 대사도 있지 않나. '그걸 어떻게 감춰요.' 일하는 것이 몹시 재미있다. 딱 재미있다. 요즘은 다른 게 화두가 될 수 없는 시기다.
김현록 기자 roky@mtstar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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