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분이 좋았어요."
한화 이글스 김경문(67) 감독이 153일 만에 승리 투수가 된 엄상백(29)의 투구를 떠올리며 한 말이다. 마음고생이 심했던 제자의 반등에 그동안 말을 아끼던 노감독의 얼굴에 모처럼 웃음꽃이 피었다.
김경문 감독은 19일 수원 KT 위즈전이 우천 취소된 후 취재진과 만나 "(엄상백의 호투는) 나도 바라고 팀도 바랐던 피칭이었다. (선발하다가) 불펜으로 나와서 본인도 마음이 찝찝하고 선발로 던지고 싶은 생각이 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팀이 원하는 자리로 가서 본인이 하나씩 역할을 하다 보니 (타자와) 승부도 하게 되고 팀도 좋아졌다. 그런 모습이 더 보이니까 나도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엄상백은 지난 18일 광주 KIA 타이거즈전에서 팀이 1-2로 지고 있던 7회말 구원 등판해 1⅔이닝 1피안타 무사사구 1탈삼진 무실점으로 한화의 4-3 역전승을 이끌었다. 4월 18일 대전 NC 다이노스전 이후 153일 만의 승리로, 엄상백의 시즌 성적은 26경기 2승 7패 1홀드 평균자책점 6.61, 79이닝 72탈삼진이 됐다.
오랜 방황을 끝낸 듯한 모습이었다. 올 시즌 4년 총액 78억 원 FA 계약으로 한화에 합류한 엄상백은 기대와 달리 5선발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김경문 감독의 믿음 아래 전반기 내내 선발 로테이션을 돌았으나, 15경기 1승 6패 평균자책점 6.33이란 결과로 돌아왔다.
후반기 들어서 후배들에게 선발 자리를 내주고서도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했다. 결국 7월과 8월 두 차례 2군 통보받았고, 8월까지 시즌 평균자책점은 7.42에 달했다.


그러나 9월 확장 엔트리로 올라온 이후 성적이 180도 달라졌다. 9월 7경기 동안 8⅔이닝을 소화하면서 단 한 번의 실점을 하지 않았다. 투구 내용도 좋아져서 볼넷 2개를 내주는 동안 8개의 삼진을 솎아냈고, 삼진을 잡지 못한 경기는 1경기에 불과했다.
2승을 거둔 18일 경기도 자신감 있는 투구가 돋보였다. 역전에 성공한 8회말 엄상백은 박찬호, 김선빈, 최형우로 이어지는 까다로운 타자들을 상대했다. 박찬호에게 우전 안타를 맞았으나, 김선빈을 체인지업으로 헛스윙 삼진, 최형우를 또 한 번 체인지업으로 중견수 뜬공 처리하고 김서현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자신 있게 스트라이크 존을 공략하는 변화구에서 지난해의 모습이 보였다.
한화가 18년 만에 플레이오프 직행을 확정하고 포스트시즌 엔트리를 고민하는 시점에서 나온 고마운 피칭이었다. 더욱이 필승조 박상원을 1군 말소하고 한승혁을 올리는 등 불펜의 체력 문제로 고민하던 시점이라 반갑다.
김경문 감독은 "본인들은 괜찮다고 하는데 올해 불펜 투수들의 피로도가 있다. 쉬고 나오면 지금보다 (구속이) 더 나올 것 같다는 생각에 조금 더 휴식을 주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엄상백의 2승에는 "뜻하지 않은 데서 승이 나오니까 아마 본인도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고 미소 지었다.
정규시즌 아쉬운 모습을 보이다가도 포스트시즌에서 극적인 활약으로 팀에 도움이 된 선수는 적지 않았다. 당장 올해 LG 트윈스에서 활약했던 엘리에이저 에르난데스(30)도 지난해 정규시즌에는 11경기 평균자책점 4.02로 평범했다. 하지만 포스트시즌에서는 6경기 11이닝 무실점 피칭으로 맹활약하면서 '엘동원(LG+최동원)'이란 애칭까지 얻었다.
엄상백 역시 활약이 기대되는 선수 중 하나다. 불펜으로 돌아와 최고 시속 152㎞의 묵직한 공을 뿌리는 엄상백은 다시 차츰 쉽지 않은 상대가 되고 있다. 엄상백의 2025시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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