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참여재판 변론 시 '뮤지컬'을 해도 괜찮아요." (엄기표 부장판사)
엄 부장판사의 해당 발언에 피고인 뮤지컬 배우 남경주(62) 측 법률대리인은 고개를 숙여 웃음을 터뜨렸다. 이 모든 상황은 중범죄인 성폭행 사건을 다루는 법정에서 이루어졌다.
26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9부(재판장 엄기표 부장판사)는 피감독자간음 혐의를 받는 남경주의 첫 공판준비기일을 진행했다. 공판준비기일엔 피고인의 출석 의무가 없어, 남경주는 출석하지 않았다.
애초 이는 단독판사가 심리하는 형사13단독에 배당됐으나, 법원은 재정합의를 통해 합의부로 재배당했다. 재정합의는 통상 쟁점이 복잡한 경우 등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하여 법원이 사건의 성격을 보고 판사 1명이 심리하는 단독 재판부 사건을 판사 3명이 함께 심리하는 합의부 사건으로 바꾸는 절차다.
이날 중요하게 다뤄진 점은 국민참여재판 진행 여부였다. 피해자 A 씨 측 법률대리인은 "피고인은 마치 이 사건이 국민참여재판으로 가야 원칙적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으나, 저희(피해자)로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피고인이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할 권리만큼이나 사건 피해자의 의사도 존중해야 한다. 재판부가 이 사건이 국민참여재판에 회부되어야 하는지 여부에 대해 좀 더 신중하게 판단해 주시길 바라는 마음이다. 피해자가 우려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게, (피고인이) 배심원 재판에 가서 법관의 판단을 회피하려는 취지로 보인다. 또 단독사건이었던 이게, 유독 이것만 어떻게 재정합의부로 가고 합의에서 또 국민참여재판으로 가야 하는 것인지 신중하게 판단해 주시길 바란다. 성폭력 피해자를 존중해 주시길 바라는 마음이다"라고 반대 의견을 냈다.
반면 남경주 측 법률대리인은 "국민참여재판 희망 의사를 말씀드리겠다"라며 "일단 피고인은 피해자 변호인이 말씀하듯, 국민참여재판 배제를 원하시는 사유를 충분히 존중한다. 다만 이 사건은 물론, 성폭력 사건이긴 하지만 일반적인 협박, 위협력 행사 사건이라기보다 피고인과 피해자 사이의 관계가 피감독자, 감독자 지위 여부를 따지고 있다. 다만 피해자가 말하는 피고인의 영향력이 너무나 막연하고 추상적이라는 거다. 과연 피고인이 피해자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 그 지위 관계 여부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고 그 부분에 대해서 변론을 집중할 계획이라는 말씀이다. 성폭행 2차 가해, 수치심을 유발하는 질문 내용이 아닌 객관적으로 피고인과 피해자가 당시 어떤 관계였는지, 이들 사이에 보호감독 관계가 있었는지 질문에 집중할 예정이다. 이런 사건이야 말로 국민의 상식에 부합하는, 국민이 판단하는 사회적 통념이 무엇인지 평가받고 싶은 입장이다"라는 뜻을 강조했다.
재판부는 남경주 측 요구대로 국민참여재판 진행을 결정 내렸다. 그 이유에 대해선 남경주도 '일생'을 걸고 신청했기 때문이라는 것. 재판부는 "합의 결과, 국민참여재판이라는 게 피해자 측 말대로 완벽하게 (피해자) 보호를 못하는 구조적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피고인 또한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한 게 일생을 걸고 하는 재판이다. 이에 피고인 변호인 측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오는 11월 27일과 30일 양일에 걸쳐 국민참여재판이 진행된다. 국민참여재판은 형사재판에 국민이 배심원으로 참여, 유무죄 판단과 양형 의견을 제시하는 제도다. 배심원단 의견은 법적 구속력은 없고 권고적 효력만 갖는다.
재판부는 첫날 서증조사와 검찰이 공소사실 요지를 밝히는 모두진술, 남경주 측이 신청한 증인들을 소환해 신문을 진행하고, 둘째 날엔 피해자 증인 신문, 피고인 신문 등과 결심 절차와 선고 절차까지 진행하겠다고 정리했다.
엄 부장판사는 "배심원을 상대로 한 국민참여재판에선 배심원 설득이 중요하기 때문에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양측이 자율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술하실 때 상대편에 대한 모욕, 비난, 위협 정도가 아니라면 어떤 형태로든 허용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때 엄 부장판사는 "본인들 전공을 살려 뮤지컬을 해도 충분히 괜찮다"라는 발언을 했다. 피해자 측이 국민참여재판에 대한 우려를 분명히 밝혔음에도 이를 가볍게 치부한 데다, 성범죄 재판의 본질과도 도무지 맞지 않는 발언으로 장내의 귀를 의심케 했다.
이 순간 남경주 측 법률대리인은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지었다. 반면 피해자 측 변호인은 즉각 마이크를 잡고 "저희는 있는 그대로 (진술을) 할 것이다. 뮤지컬은 언급될 부분이 아니다"라고 단호히 선을 그으며, 엄 부장판사의 발언이 부적절했음을 짚어냈다.
뿐만 아니라 엄 부장판사는 남경주 측 법률대리인에게 "(향후 재판 과정에서) 방송사 촬영이 결정된 부분이 있느냐. 간혹 촬영이 진행될 때가 있다"라고 물었다. 이에 남경주 법률대리인은 "재판장님 결정에 따르겠다. (남경주가) 본인 명예라던지 이 부분은 노출을 감수하더라도 나서겠다고 희망하고 있다"라고 답했다.
엄 부장판사는 뒤이어 검사에게 "방송에 나와도 괜찮겠느냐"라는 질문을 던지며 또 한 번 엄숙해야 할 법정 분위기를 흐렸다. 이에 검사는 헛웃음을 보였고, 재판부가 도리어 성폭행 사건 법정에서 얼마나 가벼운 언행을 일삼았는지 확인케 한 대목이었다.
한편 이날 A 씨 측 법률대리인은 "(남경주가) 피해자에게 사죄하는 내용이 담긴 카톡을 보냈다. 메일로 보낼 수 없다면서 카톡으로 첨부 파일과 함께 사죄의 편지를 보낸 게 있다. 이 사건 범죄 사실을 인정했다. 증거로 제출하겠다"라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앞서 지난해 12월 남경주는 서울 서초구 모처에서 제자 A 씨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A 씨는 사건 직후 112에 신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남경주는 경찰 조사에서 혐의를 부인했지만, 경찰은 혐의가 인정된다고 보고 사건을 검찰에 넘겼다.
남경주는 1982년 데뷔한 1세대 뮤지컬 배우다. 논란 여파로 그는 작년 10월 뮤지컬 '더 쇼! 신라-경주' 무대를 끝으로 활동을 중단한 상태이며, 홍익대 공연예술학부 공연예술·뮤지컬전공 부교수직도 올 3월 직위 해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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