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이정후 vs 日 오타니, SF-LAD '100년 전쟁' 더 뜨거워진다 [이종성의 스포츠 문화&산업]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 / 입력 : 2023.12.20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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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후(왼쪽)-오타니 쇼헤이. /사진=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공식 SNS, AFPBBNews=뉴스1
1958년은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역사에서 중요했다. 이른바 MLB의 서부개척시대가 열린 해이기 때문이다. 이 해에 브루클린 다저스와 뉴욕 자이언츠는 야구 도시 뉴욕을 떠나 각각 서부의 야구 신천지 LA와 샌프란시스코로 팀의 연고지를 옮겼다.

이미 뉴욕 시절부터 내셔널리그(NL)의 앙숙이었던 두 팀은 서부로 연고지를 옮긴 뒤에도 계속 숙명의 라이벌로 경쟁해 왔다.


흥미롭게도 자이언츠와 다저스는 최근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야구 스타 이정후(25)와 오타니 쇼헤이(29)를 영입해 관심을 끌고 있다. 이미 라이벌 체제가 굳어진 두 팀에 한일 대결 관계가 가미된 것이다.

두 팀이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 것은 100년이 넘는다. 뉴욕 시절에는 자이언츠가 다저스에 비해 우위를 보였다. 자이언츠는 샌프란시스코로 연고지를 옮기기 전까지 월드시리즈 패권을 5번이나 획득했다. 반면 다저스는 브루클린 시절 뛰어난 전력을 보유했음에도 월드시리즈 징크스를 깨지 못하다가 1955년에야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다저스와 자이언츠의 라이벌 의식은 1951년 절정에 달했다. 그 해 8월 중순까지 13게임 반 차이로 다저스에 뒤져 있던 자이언츠는 이후 다저스를 맹추격해 내셔널리그 공동 1위가 됐다. 결국 자이언츠는 3전 2승제로 치러진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보비 톰슨(1923~2010)의 9회말 끝내기 3점 홈런으로 다저스를 제압하고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미 자이언츠에 반감이 강했던 다저스는 이후 '타도 자이언츠'를 외치며 팀을 재정비해 1950년대 내셔널리그 최강팀으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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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열린 샌프란시스코-LA 다저스의 경기 모습. 다저스 제임스 아웃맨(아래)이 2루 도루를 시도하고 있다. 공을 받는 샌프란시스코 2루수는 브랜던 크로포드. /AFPBBNews=뉴스1
치열한 경쟁을 펼쳤던 두 팀이 공교롭게도 같은 해 서부로 연고지를 이전한 것은 사연이 있었다. 원래 자이언츠는 뉴욕을 떠나 미네소타주로 연고지를 이전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미 LA행을 결정했던 다저스의 월터 오말리(1903~1979) 구단주는 자이언츠 구단주에게 함께 서부로 떠나자는 제안을 했고 자이언츠 구단주는 이를 받아 들였다. 그래서 두 팀의 서부 라이벌 시대가 열리게 됐다.

서부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초기부터 다저스가 자이언츠를 압도했다. 다저스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황금기를 맞아 이 시기에 월드시리즈에서 3번이나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에도 3번 더 월드시리즈 패권을 거머쥐었다. 반면 경쟁 팀을 따라 서부로 떠났던 자이언츠는 오랫동안 월드시리즈 정상을 밟지 못하다가 2010년대에 3차례 우승을 일궈냈다.

월드시리즈 우승만 놓고 보면 자이언츠는 8번, 다저스는 7번 정상에 올라 우열을 가리기 애매하다. 하지만 두 팀의 사회적 영향력을 비교하면 다저스가 강했다. 다저스는 1947년 재키 로빈슨(1919~1972)을 선수로 기용해 MLB가 흑인에 대한 장벽을 허무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 서부 시대에 다저스는 유대인 투수 샌디 쿠펙스(88)의 활약에 힘입어 1960년대 2번이나 월드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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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오른쪽)가 2014년 다저스타디움에서 시구를 한 뒤 당시 LA 다저스 투수 류현진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박찬호는 다저스에서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거로 활약했다. /AFPBBNews=뉴스1
이후 1981년에는 멕시코 출신의 페르난도 발렌수4엘라(63)에 이어 1995년에는 일본 출신의 노모 히데오(55)가 스타로 등극하면서 MLB의 세계화에 공헌했다.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 박찬호(50)와 2019년 내셔널리그 평균자책점 1위에 오른 류현진(36·토론토)도 모두 다저스의 일원이었다. 박찬호와 류현진이 맹활약하던 시절 다저스는 한국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MLB 팀이었다.

또한 야구 열기가 뜨거운 타이완 선수로는 최초로 MLB에 입성했던 홈런타자 천진펑(46)도 다저스에서 뛰었다. 이처럼 다저스는 일본, 한국, 타이완 등 아시아 야구 스타를 배출한 대표적 MLB 팀이었다.

하지만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많은 67명의 MLB 선수를 배출한 일본 최초의 메이저리거는 자이언츠 소속이었다. 무라카미 마사노리(79)는 1964년 아시아 선수로는 첫 메이저리거가 됐다. 무라카미는 1963년 일본 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에 우여곡절 끝에 입단했다. 그러나 대학 진학의 뜻을 굽히지 않자 난카이 구단이 그에게 미국 유학을 제안해 겨우 팀에 입단할 수 있었다. 무라카미는 1964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산하 마이너리그 팀 프레스노에서 뛰다가 같은 해 9월 MLB 마운드에 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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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최초 메이저리거 무라카미 마사노리가 1995년 샌프란시스코의 홈 경기에 초청받아 관중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AFPBBNews=뉴스1
그러나 이듬해 문제가 발생했다. 자이언츠가 좌완 유망주 투수 무라카미와 정식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이었다. 난카이 구단은 무라카미가 어디까지나 난카이 소속 선수라는 점을 내세워 이 계약에 반발했고 자이언츠는 계약이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무라카미의 계약은 미국과 일본 야구계의 분쟁으로 비화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일본야구기구(NPB)는 무라카미가 1965년에는 자이언츠에서 뛰고 1966년부터 소속팀을 난카이로 변경한다는 중재안을 MLB 사무국에 내 사건이 일단락됐다. 하지만 당시 일본 프로야구 팬들은 무라카미와 계약한 자이언츠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됐다.

2023년 FA 최대어인 일본 야구의 영웅 오타니는 다저스 유니폼을 입었다. 하지만 오타니는 자이언츠로 팀을 옮길 수도 있었다. 두 팀이 오타니에게 제시한 입단 조건이 사실상 같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무라카미 사건 때 자이언츠가 일본인들에게 안 좋은 이미지를 남겨, 이런 정서 때문에 오타니도 다저스행을 결정한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다.

하지만 MLB 최고 스타인 오타니는 전 소속팀 LA 에인절스에서 6시즌 동안 단 한 차례도 가을야구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의 목표인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이언츠에 비해 다저스가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박찬호를 비롯한 아시아 선수들이 성공신화를 썼던 다저스에 대한 오타니의 호감도도 높았다. 그는 이미 고교 시절 "다저스에서 2020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세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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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브 로버츠(왼쪽) LA 다저스 감독과 오타니 쇼헤이. /AFPBBNews=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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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후가 샌프란시스코 유니폼을 입고 홈구장인 오라클파크 관중석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공식 SNS
이정후는 6년 동안 1억 1300만 달러(한화 약 1485억 원)라는 아시아 출신 야수로는 최고 대우를 받고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자이언츠는 다저스에 오타니를 뺏긴 후 이정후 영입에 올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자이언츠는 이정후의 뛰어난 콘택트 능력과 수비력에 높은 평가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정후는 KBO 리그에서 7시즌 동안 통산 타율 3할4푼을 기록할 정도로 정교한 타격을 선보였으며 무엇보다 선구안도 좋다. 그의 타석당 삼진 비율은 7.7%로 매우 낮다.

이정후의 롤 모델은 일본인 타자 이치로(50)다. 그래서 그의 등 번호도 이치로의 등 번호였던 51번이다. 자이언츠 입장에서도 이정후가 홈런 천국 MLB에서 단타의 미학을 선보였던 이치로 신화를 재연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활약했던 다저스에 입단한 오타니, 그리고 일본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탄생했던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게 된 이정후. 둘이 펼치게 될 선의의 경쟁은 100년 라이벌인 두 구단의 2024시즌을 더욱 뜨겁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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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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