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커 헬러의 동명 포스트아포칼립스 소설 영화

'백전노장' 리들리 스콧 감독의 신작 '도그스타: 마지막 희망'이 극장가에 착륙했다. 그런데 영화 제목도, 심지어 포스터도 이목을 끌기에는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제목을 보니 개가 나오는 영화 같긴 한데, 포스터에는 유명 배우들이 여럿 등장하면서도 개봉작인지 구작인지 선뜻 구분이 안 간다. 흔한 말로 ‘셀링 포인트’가 잘 보이지 않는 영화다. 그렇다고 외면해야 할 영화인가? 답은 아니오다. 감독의 장기인 장르적 긴장감을 능숙하게 끌어내면서도 인간다운 삶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거장의 영화다.
영화는 피터 헬러의 2012년 동명 포스트아포칼립스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버린 세상에서 주인공 힉(제이콥 엘로디)과 반려견 재스퍼, 유일한 동거인 뱅리(조시 브롤린)는 콜로라도의 공항 격납고에서 침입자들을 막아내며 살아간다. 경비행기를 조종해 식량과 연료를 수급하고 주변을 정찰하던 힉은 새로운 희망을 찾아 몇 년 전 무전을 들었던 그랜드정크션으로 떠난다.

원작 소설은 종말 이후의 생존보다 상실을 견디며 살아가는 힉의 내면을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힉의 1인칭 시점을 통해 죽은 아내에 대한 기억과 반려견 재스퍼와의 관계, 자연 속에서 느끼는 감정 등을 세밀하게 따라간다. 영화는 원작의 정서를 유지하면서 포스트아포칼립스 장르의 색채를 키우고 스릴러적 요소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각색했다. 외부의 위협과 액션은 늘렸지만, 상실 이후에도 다시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가라는 원작의 질문은 그대로 남겨뒀다.
영화가 시작되면 힉의 비행 동선을 따라 수려한 대자연의 풍경이 펼쳐진다. 음악이 더해져 목가적인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사람들이 사라진 도시는 잿빛 폐허가 되었지만, 푸른 자연은 오히려 본연의 색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듯하다. 이처럼 영화는 기존의 종말 영화와 달리 종말 이후의 세상을 잿빛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식량과 물, 연료와 무기를 확보하며 살아가는 극중 인물들의 생존 방식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위협적인 존재만 없다면 지금도 가능할 법한 자급자족의 삶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반부에는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예전에 살던 도시와 자연을 오가는 주인공의 일상이 반복되기에 단조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타운에 갈 때마다 아내와 살던 집을 찾아가 과거를 그리워하고, 이웃의 생존자들인 메노파 교도들을 챙기는 힉은 낯선 이를 경계하고 목숨부터 지켜야 하는 종말 이후의 생존 방식과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반면 총칼로 무장한 뱅리는 철저한 생존형 인물이다. 늘 경계하며 살아가는 뱅리는 다른 희망을 품고 메노파 교도들을 돕는 힉에게 ‘호의’가 오히려 생존을 위협할 수 있다고 충고한다.
고요하게 흐르던 영화가 꿈틀대는 건 모종의 사건을 겪은 힉이 그랜드정크션으로 떠나면서부터다. 마음속에 품어온 희망을 찾아 주인공이 움직이면서 영화는 본격적인 모험물로 전환한다. 도중에 위기를 겪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애틋한 감정을 나누기도 한다. 힉이 위기를 헤쳐 나가는 과정은 어떻게 보면 진부하다. 누군가 죽거나 예상치 못한 반전이 벌어질 것처럼 긴장감을 잔뜩 조성하면서도, 영화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고전적인 노선을 고집한다. 냉혹한 종말의 세계에서도 끝내 사람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는다.

SF부터 범죄, 역사, 전쟁, 드라마까지 폭넓은 장르를 오간 리들리 스콧이 만든 포스트아포칼립스물이라면 규모나 볼거리 면에서 자연스럽게 기대하는 바가 있다. 정작 이 영화는 의외로 소박하다. 화려한 기술보다는 노련한 기술로, 강한 자극보다는 잔잔한 연출로 인간다운 삶에 관해 이야기한다.
물론 후반부에는 리들리 스콧의 장기가 살아나는 액션 신들이 기다리고 있다. 뱅리가 야만적인 침입자들과 홀로 사투를 벌이는 장면에서는 공포감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반면 초반부의 아포칼립스 풍경이나 원작에서 확장한 그랜드정크션 장면은 동종 장르의 유명 영화들이 떠오를 만큼 익숙해 아쉬움을 남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끝까지 놓지 않는 것은 ‘희망’이다.

90대를 바라보는 거장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거창하지 않다. 폐허가 된 세상에서도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니 때로는 티격태격하더라도 사람끼리 나눌 수 있는 온기까지 포기하지 말고 함께 살아가자는 식이다. 어쩌면 순진한 희망 사항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의 끝을 그리면서도 절망이나 냉소에 빠지지 않는 노장의 선택은 묘한 울림을 준다. 리들리 스콧의 종말 영화에는 사랑과 희망이 넘실댄다.
유명 배우들의 출연도 구색 맞추기에 그치지 않는다. 요즘 가장 주목받는 배우 중 한 명인 제이콥 엘로디의 내면 연기를 집중해서 볼 수 있고, 마거릿 퀄리와 호흡을 맞추는 장면들도 아름답다. 생존주의자를 연기한 조시 브롤린과 가이 피어스도 각자의 역할을 확실하게 해낸다. 서정적인 음악 역시 이 영화만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몫한다. 세상의 끝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 어쩌면 반세기 가까이 영화를 만들어온 거장이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정유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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