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픈 역사에 피눈물 흘려도 여전히 찬란한 소녀들의 꿈 '노장' 김혜자와 차미경과 '젊은피' 최주은 박서경 문성현의 인상적 앙상블

1942년, 두 소녀가 있다.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듯 노래하는 이는 정임(최주은), 그런 정임을 한없이 어여쁘게 바라보는 이는 순옥(박서경)이다. 둘도 없는 단짝 친구인 둘은 언젠가 서울로 올라가 유명한 가수와 그를 보필하는 단장이 되겠다는 꿈이 있다.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는 열일곱 살 두 소녀의 찬란한 시절로 시작한다.
문제는 1942년이라는 시절이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어린 두 소녀라는 설정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그 아픈 역사를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 속 순옥과 정임 역시 일본군이 공장 취직을 핑계로 어린 여자아이들을 잡아가는 현실을 피해 몸을 숨기게 된다. 그리고 1991년, 나이 든 순옥(김혜자)과 정임(차미경)이 다시 만나 서울로 노래자랑대회인 ‘국민가요마당’에 나갈 생각으로 들떠 있다.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풀어가는 이야기 속,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기억하게 만드는지가 이 영화의 관건인 셈이다.

무거운 역사를 다루지만, ‘여전히 찬란하게’는 마냥 비극을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꿈을 빼앗기기 전 소녀들의 꿈과 우정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순회 영화 상영에 들뜬 소녀들의 반짝이는 눈빛, 영화 속 한 장면을 연기하며 토해내는 꿈에 대한 열망, 그리고 소녀들 앞에 나타난 열아홉 살 소년 두영(문성현)과의 풋풋한 사랑까지. ‘이래놓고 후반에 비극을 도드라지게 할 셈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단편영화 ‘소풍’으로 시작해 ‘꽃섬’ ‘거미숲’ ‘깃’ ‘마법사들’ 등 섬세한 연출을 증명한 송일곤 감독의 실력을 믿어도 좋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영화를 보고 나면 생각하게 된다. 거창한 역사가 아니라, 그 역사라는 무거움 아래 잊힌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과 삶을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를. 이는 송일곤 감독이 출연을 고사하던 김혜자에게 보낸 편지에도 명시돼 있다. “순옥은 울지 않습니다. 그녀는 친구와 함께한 시간이 여전히 찬란하다는 사실을 마지막까지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가 바라는 것은 한 장면의 연기가 아니라 한 인간의 존재가 시간 위에 남는 순간입니다”라고도 썼다.

김혜자가 단지 이 편지만으로 캐스팅을 수락한 건 아닐 수 있지만, 이 영화를 해야 할 명분이 되었음은 확실하다. 김혜자가 영화 공개 전 취재진에게 남긴 손편지를 보라. “여러분,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정말 잊혀지는 것들이 있어요. 그런데 잊지 않고 마음에 품고 있으면 아주 오래 전의 작은 빛도 다시 우리를 비춰줄 수 있다고 저는 믿어요.” 일제강점기 시절의 아픈 역사를 다룬 영화는 여럿 있다. 코믹의 시선을 얹으며 다른 코드로 그린 ‘아이 캔 스피크’도 있었고, ‘여전히 찬란하게’처럼 두 소녀가 등장하는 ‘귀향’이나 ‘눈길’도 있었다. ‘여전히 찬란하게’는 다른 작품과는 다른 결의 기억을 이야기하며 차별화된 울림을 준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배우들의 찬란한 연기를 보는 감상하는 맛이 일품이다. 감독의 간곡한 섭외 끝에 9년 만에 스크린으로 복귀한 김혜자는 영화의 중심축. 1961년 데뷔한 65년 연기 내공이 그의 눈빛과 표정, 호흡마다 차분히 내뿜어진다. 어린 순옥과 정임을 연기한 박서경과 최주은, 두영 역의 문성현까지 합세한 젊음의 싱그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인상적이다. 특히 ‘기리고’의 권시원으로 확고한 눈도장을 찍었던 최주은은 이 영화가 스크린 데뷔작임을 믿을 수 없을 정도. 영화의 시작과 끝이 최주은의 노래로 장식되는데, 연기는 물론 노래 실력까지 빼어난 김고은이나 김태리가 연상될 만큼 탁월한 존재감을 선보였다.

노년의 정임을 연기한 차미경의 천진하고도 불안한 눈빛도 기억에 남으며, 송일곤 감독의 영화에 단골 출연한 장현성을 비롯하여 조성하, 서영희, 정희태, 손광업 등 베테랑 배우들도 제 몫을 한다. 순옥의 손녀로 나오는 이세영과 예기치 않은 웃음을 주는 이민기도 반갑다.
‘여전히 찬란하게’는 오는 21일 개봉한다. 12세 관람가, 러닝타임 118분.
ize사이트에서 더 많은 컨텐츠를 만나보세요!
<저작권자 ©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