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4특집]'덕혜옹주', 드라마틱한 시대 그리고 손예진①

[빅4특집]'덕혜옹주'

김현록 기자 / 입력 : 2016.07.07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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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덕혜옹주' 포스터


올 여름 극장가에는 한국영화 빅4가 관객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부산행' '인천상륙작전' '덕혜옹주' '터널', 100억 원대 제작비가 투입된 다른 색의 한국형 블록버스터 4편이 어떤 모습으로 관객과 만날지, 스타뉴스가 먼저 짚었다. 세 번째 주자는 '덕혜옹주'다.

고종이 환갑을 맞던 1912년 태어난 늦둥이 막내는 늙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일제의 압박 속에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덕수궁을 지키던 고종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어여쁜 외동딸은 세상 사는 낙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소주방 나인 출신 후궁 복녕당 양씨의 소생으로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으나, 고종은 처소인 함녕전에 딸을 데려갈 만큼 애지중지했다. 그는 딸이 다섯 살이 되자 궁 안에 유치원을 만들어 또래들과 어울리며 지내게 했고, 심지어 일제에게 딸을 뺏기기 싫어 은밀히 시종의 조카와 약혼을 시도하기도 했다. 어쩌면 고종은 예감했을지 모른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홀로 남을 딸의 기구한 운명을. 그녀의 이야기가 올 여름 극장가에서 관객과 만난다. 허진호 감독이 연출하고 손예진이 주연을 맡은 영화 '덕혜옹주'(제작 호필름)다.


영화의 타이틀롤인 덕혜옹주는 지금보다 그 시절 훨씬 더 유명했다. 그녀는 고종뿐 아니라 나라를 잃고 마음 둘 곳 없이 실의에 빠져있던 조선의 국민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던, 이른바 그 시대의 아이돌 스타였다. 영국 왕실의 로열 베이비가 대중의 관심을 한몸에 받듯, 덕혜옹주도 종종 신문에 사진과 소식이 실리는 그 시절의 '국민 여동생'이었던 셈. 잠시 행복한 유년기를 보내기도 했지만 격랑의 시대는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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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예진 / 사진='덕혜옹주' 스틸컷


그 시절 조선의 왕족은 사실상 아무런 힘이 없는 상징적 존재였지만 그 뿌리마저 끊으려던 일제는 왕가 자손들을 일본에 유학하게 강제했고, 결혼마저 일본인과 하도록 하고 있었다. 어린 덕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19년 고종이 갑작스럽게 승하하고 몇 년 뒤, 그녀는 만 13세의 나이로 강제 유학을 떠났다. 1931년에는 일본 대마도의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 백작과 결혼까지 했다. 대한제국 옹주가 지금으로 따지면 일본 군수 아들과 결혼을 한 격이니 민심이 들끓었다. 그녀의 결혼사진이 남편 자리를 새카맣게 지운 채로 신문에 실렸을 정도다.


불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그녀는 모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이 왕족의 귀환을 부담스러워 한 탓이다. 몽유병, 조현병 등으로 고생하던 덕혜는 1946년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남편과 이혼했으며, 외동딸은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됐다. 그 이후 존재 자체가 잊히다시피 했던그녀는 1962년이 되어서야 겨우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이 온전치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실어증 등으로 고생하다가 1989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실로 드라마틱한, 비운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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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덕혜옹주' 스틸컷


영화화는 우연히 시작됐다. 2007년 KBS에서 선보인 다큐멘터리가 허진호 감독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망국의 마지막 공주, 덕혜옹주의 삶을 다룬 50분짜리 다큐였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시작으로 '봄날은 간다', '행복' 등을 선보이며 감정의 미세한 결을 포착해 온 그는 스스로도 '원래 잘 안 운다'는 사람이지만, 그 날은 TV를 보다 눈물이 났다. 그녀의 삶이 너무나 기구했다. 특히 공항의 모습이 머리 속에 떠나지 않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멜로의 대가'로 관객에게 사랑받았던 허 감독이 다뤄왔던 이야기와는 조금 달랐지만, 감독은 영화화를 꿈꿨다.

하지만 단순히 따져보기에도 '덕혜옹주'는 만만한 프로젝트가 아니다. 여자가 주인공이었고, 일제강점기가 배경이었으며, 시대극이라 만만찮은 예산이 필요했다. 비운의 여인의 암울한 이야기인데, 심지어 그 여인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지난해 전지현을 앞세운 '암살'이 성공하고, 올해 '아가씨'가 터지긴 했지만,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는 안 된다', '일제강점기 영화는 다 망한다'는 속설을 많은 이들이 철썩같이 믿던, 심지어 실제로도 그랬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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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덕혜옹주' 스틸컷


2009년 나온 권기영 작가의 소설 '덕혜옹주'는 허진호 감독의 고민에 힘을 실어 준 계기였다. 출간 이후 무려 100만부 이상이 팔린 소설은 영화화에 큰 힘이 됐다. 무엇보다 그녀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그녀의 삶에 대한 사람들의 연민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판권 확보와 함께 영화 '덕혜옹주'의 프로젝트도 서서히 가동될 수 있었다. 그렇게 허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접한 지 10년째가 되는 올해 '덕혜옹주'가 드디어 빛을 본다.

영화 '덕혜옹주'는 한 인물의 일생을 다룬 전기영화가 아니다. 이 여인의 기구한 삶을 바탕으로 허구를 더한 팩션(faction)이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왕족을 망명시키려 시도했던 일을 그녀의 삶과 접목시켰다. 그녀의 삶에 대해 알려진 것이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라면먹고 갈래요'를 히트시킨 허진호 감독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즐겨 선보여 온 영화 감독이다. 수동적일 수 밖에 없는 처지지만, 덕혜 역시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성을 갖춘 인물로 표현하려 많은 고민을 거쳤다. 실존 인물과 상상의 인물이 더해졌고, 소설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추가돼 이야기가 더욱 풍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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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덕혜옹주' 스틸컷


타이틀롤을 맡은 손예진은 영화 전체를 이끈다. 100억대 영화를 끌고가는 중책이 그녀의 어깨에 지워졌다. 2006년 '외출'로 이미 손예진과 한 차례 호흡을 맞췄던 허진호 감독은 그녀의 폭발력을 믿었다. 허진호 감독은 "감정을 분출하는 데 있어 굉장히 힘있는 배우"라며 "옛날보다도 훨씬 힘이 생겼다"고 혀를 내둘렀다. 몰입하기 위해 추운 새벽 촬영 내내 바닥에 누워 극한의 감정을 유지했을 정도로 열의도 대단했다. 손예진은 "촬영 내내 책임감과 부담감이 뒤따른 것도 사실이지만 덕혜옹주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그녀의 삶을 영화 속에 잘 담아 관객분들께도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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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일 / 사진='덕혜옹주' 스틸컷


이밖에도 쟁쟁한 배우들이 '덕혜옹주'와 함께했다. 남자주인공 장한 역의 박해일 또한 상당한 비중으로 극을 이끈다. 일본 군복을 입은 채 포스터에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덕혜와 조국을 되찾기 위해 애쓰는 독립운동가 역할이다. 특유의 온화한 카리스마가 영화에 또 다른 느낌을 더한다. 코믹한 감초 연기자로 주로 소비되던 라미란의 변신 또한 눈여겨 볼 대목이다. 라미란은 덕혜의 곁을 지키는 유일한 시녀이자 친구 복순 역을 맡아 극에 활력과 눈물을 더한다. 장한의 동료 복동 역의 정상훈 또한 마찬가지다. 악독한 친일파 한택수로 윤제문이 출연하며, 고종 역으로는 백윤식이 출연해 무게감을 더한다. 손예진과 극강의 싱크로율을 자랑하는 어린 덕혜 역 김소현 또한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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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미란 / 사진='덕혜옹주' 스틸컷


'덕혜옹주'는 통쾌한 블록버스터들이 즐비한 여름 시장의 또 다른 도전이다. 시원히 때려 부수는 신나는 대작들이 주로 관객을 맞는 시기, 생각만 해도 가슴 아린 비운의 여인이 똑똑 관객의 마음 문을 두드린다. 다가오는 8월, 관객들이 기꺼이 그 문을 열어줄 것인지 지켜 볼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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